국은 이한응열사 묘비건립에 즈음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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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거금 16년전의 을사는 실로 우리 역사에 있어 씻지 못할 치욕의 해인 것이다. 19세기 중경부터 구미의 자본주의 문화로 재무장한 일본은 침략의 마수를 먼저 우리나라에 뻗치게 되었다. 그들은 가지가지의 악랄한 수법으로 침략정책을 강행하여 많은 파란과 비극을 우리 근대사상에 일으켰는데 특히 청·일전쟁에 승리한 그들은 우리의 강토를 독점하려 날뛰다가 또 하나의 침략세력인「러시아」와 마주치게 되어 마침내 1904년 2월에「러시아」와 싸움을걸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개전벽두에 한국정부를 강압하여 소위 한·일의정서를 꾸며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단서를 열어 놓더니 그 해 8월에 그들은 또다시 한국정부를 억눌러 소위 제1차 한·일협약을 늑체하여 고문정치를 시작함으로써 한국의 주권은 거의 거세되었다. 특히 외교권이 유린됨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국제적 지위는 크게 전락되었다.
그 이듬해 봄에 노·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포츠머스」조약으로(9월)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우월권이 인증되매 그들은 침략군의 총검을 앞세우고 소위 5조약(을사보호조약)을 늑체하여(11월) 우리 외교권의 완전박탈과 아울러 통감정치를 강행케 되었다. 이에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의분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목숨을 조국의 제단에 바쳤는데 이러한 을사순국의 선구를 이룬 분이 곧 국은 이한응 선생이다. 선생은 고종11년 갑술(1874)에 용인에서 출생, 천자가 영오명민하여 일찌기 한학을 닦아 일가를 이루었으며 16세에 상경하여 관립 영어학교에서 수학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광무5년 신축에 주차영의량국공사관 3등서기관으로 공사 민영돈과 함께 영경「런던」에 건너가니 이때부터 선생은 국제무대에서 활약케 되었다. 광무8년 갑신(1904)에 민영돈이 귀국하매 선생은 서리공사로서 복잡하고도 중요한 대영외문에 전책임을 맡게 되었다. 선생이 서리공사로 되던 그 해 2월에 노·일전쟁이 터지자 앞에 말한바와 같이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의 늑체로 말미암아 우리의 외교권은 거의 거세되다시피 되어 한국의 주외사절은 그 존속의 가치조차 잃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통한과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최후의 방책으로 각국에 주재하던 한국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하여 공동대책을 토의코자 하였으나 이에 호응하는 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한편 노·일전쟁에 승리를 거둔 일본은 노국과의 강화에 앞서 영국으로부터「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인증받으려는 소위 영·일동맹확장협약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선생은 본국정부와 연락하고 그 불법, 부당성을 들어 영국정부에 항의하였으나 일본과 결탁한 영국은 이러한 정의의 주장에 응 할 리가 없었다. 이에 선생은 만리이역에서 외로운 몸으로 백가지로 생각하고 천 가지로 헤아려 보아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선생은 비장하게도 침략자에 대한 영원의 항거로써 목숨을 조국에 바치는 길을 택하여 국민에게 호소하는 비장한 유서와 그의 백씨 및 부인에게 보내는 유언장을 남기고 「런던」객관에서 조용히 약을 마시고 나라에 순하니 이는 광무9년 을사(1905) 5월l2일의 일이었다. 이와 같이 선생은 32세의 꽃다운 나이로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하셨던 것이니 실로 치욕의 5조약이 늑체되기 반년전의 일인 것이다. 국은 이한응 열사 추막회에서 작년에 순국 60주년을 기하여 선생과 인연이 깊은 장충단에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금년에는 선생의 순국일인 5월12일을 기하여 묘비를 세우게 된 것은 비록 만시의 탄은 있으나 선열을 추모하는 후인들의 일편단심을 바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사진=「런던」시절의 국은 이한응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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