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통화기금 설립 美 반대 설득이 관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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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우리 정부가 발표할 동아시아 비전그룹(EAVG)의 보고서는 동아시아 지역공동체 결성의 청사진이자 설계도다. 동아시아 지역 공동체의 큰 방향을 제시하면서도 그동안의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실천적 조치도 담았다.

동아시아 지역공동체 설립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미국이 최근 들어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고 있는 만큼 공동체 결성과 관련해 이번 보고서의 의미가 각별하다는 게 외교 소식통의 평가다.

특히 한국은 이번 보고서 작성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향후 동아시아 공동체 설립에서 주도권을 잡을 전망이다.

보고서의 지향점은 '3P'로 집약된다.한.중.일과 아세안을 합친 동아시아 지역공동체의 비전으로 평화(peace).번영(prosperity).발전(progress)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6개 분야의 협력을 내걸었다.

그중에서도 통화기금(EAMF)설립 제안이 눈에 띈다.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일본이 내놓은 아시아통화기금(AMF) 구상이 미국의 반대로 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이같은 현실을 감안해 EAMF를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보완적 기구로 자리매김했다.

금융위기 때 구제 조치를 취하는 안전망 역할을 하지만 IMF의 기능을 보완하는(supplementary to the IMF)것이라고 못박았다.

보고서가 역내 금융 감시 체제 강화를 IMF 체제를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명시한 점도 한 맥락이라는 분석이다. 이같은 조치들은 동아시아의 독자적 통화체제 구축에 대한 미국의 반대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EAMF 구상이 순항할지는 미지수다. 기금의 재원 분담이 쉽지 않을뿐더러 이를 둘러싼 주도권 문제라는 정치적 이해도 걸려 있기 때문이다.

외교 소식통은 "역내외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해볼 때 보고서는 무척 민감한 화두를 던진 셈"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EAFTA)의 조기 출범 제안도 주목된다.이달 초 상하이(上海)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가 무역 자유화 목표시점으로 재확인한 '선진국 2010년,개발도상국 2020년'보다 앞서 자유무역지대를 설치하자는 것이다.

이 방안의 실현은 아세안과 한.중.일 3국간의 접목이 관건이다.중국이 연내에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일본과 싱가포르가 최근 자유무역협정에 합의한 것은 이와 관련해 고무적인 것들이다.EAFTA 출범 문제는 한.일 자유무역지대 설치 논의를 가속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고서는 정치.안보 협력 분야에서는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 군사 교류나 대화 채널 구축,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강화를 제시하는 선에서 그쳤다.이는 동아시아 지역공동체 구상이 안보보다는 경제 협력 쪽에 무게를 두고 있음을 방증한다.

다만 아세안이 한.중.일을 초청하는 형식의 아세안+3국 정상회의를 동아시아 정상회의로 발전시키는 방안은 회원국의 공감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열린 동아시아 지역공동체 결성을 위해선 호혜적 정상회의체가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EAVG의 이번 보고서는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혀 주는 계기도 됐다.우리나라가 주도해 동아시아 지역협력체에 대한 중장기 비전을 제시한데다 아세안과 중.일간의 가교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역내 통합 문제와 관련해선 일본 또는 중국이 주도하는 데 대해 회원국의 거부감이 강한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오영환 기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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