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가슴에 메아리진 "불우한 급우를 돕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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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울 청량국민학교 6학년 9반. 칠판에는 또박또박 띄어쓴『불우한 급우 해윤이를 돕자』는 글귀가 눈을 꿰뚫는다.
가난과 허기에 지쳐 한달 동안 학교를 쉬고있는 한 독립투사의 딸 유해윤(13)양을 도와주자는 따스한 물결이 급우 80여명의 가슴에서 여울져 흐르고있는 것이다.
○…해윤양은 광복투사 유만수(45)씨의 딸. 해윤양이 가정형편으로 한달 동안 결석하자 지난 7일 하오 학우 5명은 담임선생(손낙보)과 함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7(5통 5반) 누더기 판잣집에 셋방을 얻어 살고있는 유양을 찾았다. 어린이 회장 김기혜양 등 급우 5명은 오래 못 본 유양을 끼어 안고 울었다. 이들은 정성 들여 모은 쌀 두말, 교과서, 참고서, 공책, 그리고 연필 동을 안겨주고 앞으로도 계속 유양이 내일의 희망을 간직할 때까지 돕겠다고 다짐했다.
○…해윤양의 아버지 유만수씨는 조문기(42) 강윤국(42)씨와 함께 널리 알려진 애국 3총사. 해방되던 그해 7월 부민관(현 국회의사당)에서 친일거두 박춘금씨가 연 대의당의「아세아 민족분격대회」에 잠입, 사제폭탄 2개를 터뜨려 단상에 자리잡고있던「아베」총독, 인도 등지에서 온 외국대표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었다. 그러나 해방 후엔 철공소직공으로 일하다 폐병에 걸려 지금은 마산요양소에 입원중이다.
○…생활의 기둥을 잃다시피 한 유양의 어머니 김개갑(35)씨는 5남매를 거느리고 살기 위해 매일 새벽부터 두부와 묵을 이고 행상을 해야만했다. 하루벌이는 기껏해야 50원. 이것은 아이들 학비는커녕 그런 대로 끼니를 이어 왔던 보리죽마저 댈 수 없는 것. 거기다 6개월이나 밀린 방세(3천원)를 못내 당장 쫓겨날 형편에 젖먹이 세종(2)군의 홍역이 잘못되어 두 번이나 수술을 받게되자 어머니 김씨는 살을 에는 괴로움을 겪으며 행상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서야만했다.
어머니마저 집을 비우면 유양은 어린 동생 민(9·청량국교 3년) 세종군 그리고 경자(7) 경숙(4)양의 뒷바라지를 도맡아야 하는 어린 어머니 노릇을 하느라고 학교엘 못 갔다.
○…학교에 가려고 해도 밀린 기성회비, 당장 쓸 연필과 한 권의 교과서조차 없었다. 이런 딱한 사정을 안 담임 손 선생은 유양 얘기를 수업시간에 들려주었다. 눈시울을 붉힌 동료들은 해윤양 돕기 운동을 벌이고 담임선생은 유양의 학비면제를 교장에게 청원, 승낙을 받았다. 『불우한 급우 해윤이를 돕자』는 운동은 6학년 9반의 어린 가슴에서 비롯되어 학교전체에 번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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