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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용한 점쟁이 찾고 계시나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04호 28면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중 델포이의 무녀.

"새해가 되니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장터에 토정비결 앱들이 인기 상위로 올라왔다. 운세 관련 국내 앱은 총 20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블로그와 SNS로 홍보하는 역술인과 무속인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21세기에도 점술 비즈니스는 몰락하기는커녕 오히려 첨단 미디어를 활용해 성업 중이다.
그러나 돈을 주고 얻은 운세 예측은 그럴듯해 보여도 뜯어보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고대의 신탁(oracle)부터 그랬다.

신년 운세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BC 6세기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칠 준비를 하면서 영험하기로 소문난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앞날을 물었다. 무녀가 준 신탁은 이랬다.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한다면 그는 큰 왕국을 멸망시킬 것이다.” 크로이소스는 당연히 자신이 이긴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신나게 싸우러 나갔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게 보기 좋게 패하고 이로써 리디아는 멸망했다.
목숨만 건진 크로이소스는 델포이에 가서 따졌다. 그러자 무녀는 “멸망한다는 그 왕국이 키루스의 것인지 자기 자신의 것인지 물어봤나”라고 대꾸했다. 크로이소스는 “아아, 그랬구나” 하고 수긍했다. “그딴 예언은 나도 하겠네” 하면서 신전을 다 부숴놓는 게 더 적절한 반응이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델포이 신탁은 항상 그런 식이어서, 심지어 영어의 ‘Delphic’이란 단어는 ‘델포이의’라는 뜻뿐 아니라 ‘애매모호한, 아리송한’이란 뜻도 있다.

그나마 명쾌한 예측을 해서 족집게처럼 맞힌 드문 예로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결과를 맞힌 점쟁이 문어 파울이 있을 것이다. 사실 파울이 진짜 신통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8경기 승패를 우연으로 연속 맞히는 것이 확률이 낮긴 하지만 그보다 낮은 확률의 일도 우연으로 일어난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축구에 도통한 해양생물관 직원이 자신이 예측하는 방향으로 파울의 움직임을 유도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2010년 11월 문어 파울이 자연사했을 때 각국의 반응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축구장에서 현수막까지 들고 점쟁이 문어를 추모했다. 파울이 4강전과 결승전에서 스페인의 승리를 예측해 맞혔기 때문에 그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반면 디에고 마라도나 전 아르헨티나 축구대표팀 감독은 트위터에 “신통력 문어야, 네가 죽어서 기쁘다. 월드컵에서 진 건 다 네 잘못이야!”라는 말을 남겼다. 파울은 독일-아르헨티나전에서 독일의 승리를 예측해 맞혔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만약 파울이 진짜로 신통력이 있었다고 치더라도 스페인이 이기거나 아르헨티나가 지는 미래를 미리 본 것뿐이지 미래에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스페인 사람들은 “파울 덕분이야”라고 말했고, 월드컵에서 진 나라 사람들은 “이놈의 문어 때문에”라고 했다. 아마 반은 농담이겠지만 반은 진담이었을 것이다.

동서고금 인류는 유리한 예언을 하는 예언자에게 고마워하고, 불리한 예언을 하는 예언자는 미워해 왔다. 백제 의자왕도 “백제는 보름달, 신라는 초승달”이라는 거북 등딱지의 문구를 “백제는 이제 기울 것이고 신라는 이제 차오를 것”이라고 해석한 무당의 목을 쳤다지 않은가.
이것은 사람들이 예언의 자기성취력을 은연중에 믿기 때문이다. 예언이 단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언이 말해지는 순간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말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는 믿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는데, 언령신앙(言靈信仰)이라고도 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한국 속담이 단적인 예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조선시대 새해 덕담은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확정형을 썼다고 한다. 즉 “올해에는 지병에서 완치되소서”가 아니라 “올해에는 지병에서 완치되셨다니 기쁩니다” 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일종의 긍정적 예언을 하며 자기성취력을 기대하는 것이다.
사실 점집을 찾거나 점술 앱을 터치하는 사람 중 다수는 경기침체, 학업 고민, 취업난 등등에 지친 마음을 달래줄 희망적인 예언, 기분 좋은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돈을 주고 불길한 말을 들을 위험을 감수하며 점술을 찾기보다 선조들이 했던 확정형 덕담을 나누며 자기암시를 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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