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진시인 문정희씨 '오라, 거짓 사랑아'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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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 되는 날, 촛불 한 개를 켜놓고/여성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인간이 되는/첫번째 생일을 맞으리라는/친구여/촛불을 불기 전에 생각해 보아라/그대 그날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이제는 심지어 여자조차 아닌/아무짝에 쓸모없는/아줌마가 되는 것뿐이로다/여자 나이 마흔 그리고 쉰/저 푸르고 넉넉한 목초지를/벌써 폐허로 내던져놓고/가죽장화 신은 도적떼들이 지나가고 있다"('촛불 한 개'중)

중진시인 문정희(文貞姬.54.사진) 씨가 최근 펴낸 신작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민음사.5천5백원) 에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아줌마'의 내면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세상은,도적떼 같은 남자들은 폐허로 내던져놓았지만 여전히 푸르고 넉넉한 목초지로서의 40,50대 여성의 사랑과 생산성을 시력(詩歷) 30여년의 원숙한 시로서 자연스레,섹시하게 드러내고 있다.

"검은 하수구를 타고/콘돔과 감별당한 태아들과/들어내 버린 자궁들이 떼지어 떠내려 가는/뒤숭숭한 도시/저마다 불길한 무기를 숨기고 흔들리는/이 거대한 노예선을 떠나/가을이 오기 전/뽀뽈라로 갈까/맨 먼저 말구유에 빗물을 받아/오래오래 머리를 감고/젖은 머리 그대로/천년 푸르른 자연이 될까"('머리 감는 여자'중)

이제 중년을 너머 깊은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 나이는 불모(不毛) 다. 나이보다 도시문명의 현대적 삶은 뿌리를 뽑힌채 삶 자체를 하나의 연극, 한판의 컴퓨터 게임에 불과하게 만든다.

이런 불모의 시공에서 문씨는 멕시코 정글 속 마을 뽀뽈라 아낙들의 천년 푸르른 자연의 삶을 꿈꾼다. 아니 지금 문명 사회에서도 어쨌든 자연스런 욕망의 흐름에서 이탈하려하지 않고 있다. 해서 자신이 곧 자연이 되려하고 있다.

"사랑에 대해서라면/너무 깊이 생각해 버린 것 같다/사랑은 그저 만나는 것이었다/지금 못 만난다면/돌아오는 가을쯤 만나고/그때도 못 만나면 3년 후/그것도 안 되면 죽은 후 어디/강어귀 물개의 집에서라도 만나고/사랑에 대해서라면/너무 주려고만 했던 것 같다/준 것보다 받은 것이 언제나 더 부끄러워/결국 혼자 타오르다 혼자 스러졌었다/사랑은 그저 만나는 것이었다/만나서 뜨겁게 깊어지고 환하게 넓어져서/그 깊이와 그 넓이로/세상도 크게 한번 껴안는 것이었다"('물개의 집에서'전문)

'사랑은 그저 만나는 것'이라는 깨달음,'그저','산 절로 물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라는 동양적 자연관의 깨달음이 이 시대 불모의 삶을 삼라만상 크게 한번 껴안는 대지적.여성적 삶으로 바꾸고 있다. 그래 우리의 삶을 또다른 시 '몸이 큰 여자'에서와 같이'비옥한 밭이랑의/왕성한 산욕과 사랑의 노래가'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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