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色동양' 우리는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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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태양극단의 '제방의 북소리'(17일까지, 국립극장 특설무대) 첫 내한공연은 우리 연극계에 오랜 여운을 남길 것 같다.

그 '충격파'는 크게 두가지 무늬일 것이다. 하나는 기발한 형식과 담대한 주제를 총체극으로 우려낸 족탈불급의 경이로움 때문일 게고, 다른 하나는 서양사람도 동양의 정신을 저리 수용해 재해석해냈는데 우리는 그동안 뭘 했냐는 후회가 뒤엉킨 비탄 탓일 것이다.


프리뷰 기사에서 언급했듯 '제방의 북소리'는 세계 연극의 정상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그런 평가도 따지고 보면 본고장(프랑스) 평단의 그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에 불과했는데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그 평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방의 북소리'는 주형식을 일본의 전통 인형극 분라쿠(文樂) 에서 차용했다.

연출자 아리안 므누슈킨은 한.중.일을 포함한 동양 각국의 전통예술을 편견없이 수용했음이 분명한데, 그래도 '짝사랑'을 요구하는 우리 관객들에게 이조차 오해를 살 요소는 있었다. 의상디자인.색감.인형들의 움직임에서 분라쿠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형식미도 거대한 주제와 맞닥뜨리면 일순 힘을 잃고 만다. 형식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므누슈킨은 세상을 무(無) 로 만들, 제방의 붕괴라는 절대절명의 순간 앞에 선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장엄한 비극의 드라마로 부각시켰다.

계급갈등과 선악.전쟁 등 인류의 보편적 물음으로 환기시켰으며, 당면한 환경문제도 비중 있게 추가했다. 이런 긴장을 시적(詩的) 언어로 집약한 작가 엘렌 식수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환생은 아닐까 착각하게 했다.

잡다한 동양 것을 포스트모던하게 재구성한 '혼성모방'의 틈새에서 '우리 것'을 찾으려는 집착은 과연 소아병적인가. 유치한 발상이라는 눈총을 무릅쓰고 일단 저울질을 하면 우리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비중으로 돋보였다.

걷잡을 수 없는 도도한 운명의 도래를 알리는 1막 말미 사물놀이의 울림과 카오스의 구원자로 등장하는 피날레의 갓쓴 한국인(인형극쟁이 바이주) 의 모습과 행동이 그랬다.

만약 시정(市井) 의 잣대로 쳐 일본 분라쿠가 계속 눈 속에 어른거려 분해하는 관객이라면 이같은 질의 '승리'에 만족하는 게 좋겠다.

아무튼 '제방의 북소리'는 여러모로 "우리(동양) 는 무엇인가"를 되묻게 하는 중요한 텍스트다. 무대에 충만한 므누슈킨과 태양극단 단원들의 땀냄새에 몸과 마음으로 존경한 '동양'이 묻어 있었다.

따라서 동양을 잘 버무려 '상품'으로 팔아 먹는 서양 예술가가 아닐까, 하는 므누슈킨에 대한 일부의 의심은 기실 못난 우리의 자화상을 드러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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