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식인 지도] 플러렌과 탄소나노튜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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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미 라이스대에서 공동연구를 수행해 온 스몰리.크로토.컬 세 교수가 탄소 60개로 이루어진 분자를 처음 분리해냈을 때, 그 기하학적 구조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그들은 밤잠을 설치면서 60개의 탄소원자가 결합한 구조를 알아내기 위해 고심했다.

이 때 그들의 상상력에 영감을 준 것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Expo-67' 박람회의 상징건물이었다. 미국의 건축가 버크민스터 플러가 설계한 이 구조물은 6각형과 5각형이 섞인 둥근 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스몰리는 실제로 종이를 6각형과 5각형 모양으로 오려 붙이다가 축구공 모양을 만들어 냈고, 그 60개의 꼭지점에 각각 한 개의 탄소원자를 배열함으로써 드디어 그 구조를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건축가의 이름을 따 이 분자구조를 플러렌 혹은 버키볼(버크의 공)이라 명명했다.

이와 달리 어느 초청강연에서 크로토는 자기가 이러한 구조를 규명해 냈다고 주장, 스몰리와 충돌했다. 절친한 연구 동료였던 두 사람은 결국 이 일로 인해 87년 서로 결별하게 됐다. 96년 노벨 화학상은 사이좋게 두 사람 모두(컬 교수까지 모두 세 명)에게 돌아갔다.

플러렌은 발견 초기에 윤활제, 의약 성분의 저장 및 체내 운반체 등으로 이용하려는 연구가 있어왔지만 최근 더 큰 가능성을 보이는 분야는 여러 금속 원자를 섞어 도체.초전도체로 이용하거나 수많은 플러렌을 서로 연결해 새로운 섬유.촉매.센서(감지기) 등으로 쓰는 것이다. 그 미세한 구조로 인해 조그만 양으로도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여줄 수 있다.

한편 플러렌의 발견 후 91년 일본 전기회사(NEC)의 연구책임자인 수미오 이지마 박사는 쓰쿠바 연구소에서 여러 가지로 변형된 플러렌 구조를 고성능 전자 현미경을 통해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전자현미경 화면에 가늘고 긴 튜브 모양의 탄소 구조가 들어왔다. 그는 이것을 탄소나노튜브라 불렀다.

이것은 사실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었지만, 처음에는 플러렌만큼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플러렌의 실제 응용이 생각보다 잘 이루어지지 않고 플러렌에 큰 기대를 걸었던 많은 과학자가 초조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늘고 긴 섬유 모양의 탄소나노튜브가 점점 새로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극소형 트랜지스터나 초강력 섬유 등의 여러 응용면에서 가늘고 긴 선 모양을 한 탄소나노튜브가 단연 유리했다.

그리고 플러렌과 달리 탄소나노튜브는 비교적 쉽게 기판 위에서 많은 양을 성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94년께 스몰리는 연구대상을 서서히 플러렌에서 탄소나노튜브 합성 쪽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많은 다른 과학기술자가 그 뒤를 따랐다. 이리하여 탄소나노튜브는 플러렌이 누렸던 영광스러운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임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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