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식인 지도] 나노테크놀로지의 리처드 스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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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 대중의 머리 속에 전설적인 천재 과학자로 남아있는 리처드 파인만은 일찍이 1959년에 다음과 같은 예측을 하였다.

즉 원자.분자의 수준에서 물질의 성질을 조절함으로써 현미경으로도 간신히 보일까 말까 한 작은 부속품들을 만들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22년 후인 81년 미국이 아닌 스위스에서 로러와 비닉이 주사형 검침 현미경이라는 새로운 전자 현미경을 발명함으로써 조그만 물질세계를 탐구하거나 새로운 물질을 원자.분자 크기에서 조작하는 기술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85년 리처드 스몰리(Richard Smalley) 등은 자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칭성을 가진 분자 '플러렌'( C60:탄소 원자 60개가 축구공 모양으로 배열된 것)을 발견했고, 91년 일본의 수미오 이지마가 탄소나노튜브를 발견하여 조그만 물질 세계의 신비를 벗겨 나갔다.

이들 분자의 크기는 대략 1나노미터, 즉 10억 분의1m로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 정도이며 초고성능 전자 현미경으로만 관찰이 가능하다.

그리고 2000년 1월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은 파인만이 생전에 교수로 봉직했던 캘리포니아공대(Caltech)를 방문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국가나노기술구상'을 발표했다.

*** 원자.분자 수준서 물질 조절

"우리는 국가나노기술구상을 위해 이제 5억달러를 투입할 것이다. …솜털 같은 무게로 강철보다 열배 강한 물질을 만들어 내고, 국회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방대한 자료 전체를 각설탕만한 기억소자 안에 담을 수 있고, 암세포가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부터 감지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는 20년 이상 소요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연방정부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발표가 기폭제가 되어 일본.유럽, 그리고 한국 등 세계 각국은 정부의 주도 하에 나노기술경쟁에 뛰어들게 된다.

85년 플러렌 분자를 발견하여 96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또한 94년 이후에는 탄소나노튜브 연구에 전념하여 많은 업적을 내고 있는 스몰리는 미국 나노과학기술의 핵심이요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석유산업과 허리케인으로 더 잘 알려졌던 미국 남부의 무더운 도시 휴스턴은 스몰리(그리고 고온초전도체 합성으로 유명해진 폴 츄와 함께)에 의해 새로운 나노과학기술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노벨상을 수상하던 해 휴스턴의 라이스대에는 새로운 나노과학기술센터가 설립돼 스몰리는 센터 소장으로서 왕성한 연구 의욕을 갖고 많은 과학기술자들을 이끌고 있다.

*** 100만배 성능 기억소자 가능

나노기술은 클린턴 대통령의 발표에도 묘사돼 있듯이 꿈의 미래기술로 생각되고 있다.

공 모양을 한 플러렌의 경우 그 안에 약 성분을 저장해 운반하는 운반체가 되거나 혹은 그 자체가 하나의 조그만 폭탄이 되어 몸 속의 병든 세포에 가서 작용한다든지, 마찰없는 매끄러운 물질로서 윤활작용을 한다든지 하는 응용 가능성이 추구돼 왔다.

플러렌들을 길게 한 줄로 연결해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연구도 진행돼 왔고, 특히 플러렌을 이용해 극소형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연구는 지난해 미국 버클리대 물리학자들에 의해 성공한 사례가 보고되었다. 여기에는 한국인 박홍근 박사와 학생인 박지웅씨가 중요한 기여를 했다.

만약 트랜지스터 한 개의 크기가 이처럼 몇 나노미터 정도로 축소돼 장래에 이들을 빽빽하게 배열시킬 수 있다면 현재 사용하는 가장 발전된 트랜지스터의 1백만배 성능을 갖게 된다.

그러나 플러렌을 튜브 모양으로 가늘고 길게 변형시킨 물질이라고 볼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가 91년 일본에서 발견된 후 스몰리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탄소나노튜브에 더 많은 기대를 걸게 되었다.

응용면에서도 가늘고 긴 대롱 모양을 한 탄소나노튜브가 초강력섬유.트랜지스터 등의 전자회로 부품이나 TV에 쓰일 극소형 전자총 등 여러 분야에서 플러렌보다 훨씬 가능성이 큰 것으로 인식되었고, 플러렌의 발견자 스몰리가 이제 탄소나노튜브 분야의 선도자가 되면서 대량 합성 쪽에서도 탄소나노튜브가 훨씬 앞서게 되었다.

흥미있는 사실은 스몰리가 나노과학기술의 세계적 리더가 되었으면서도 나노기술의 장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낙관을 경계하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해왔다는 사실이다.

스몰리와 대립되는 가장 급진적인 나노기술 예찬자라고 할 수 있는 에릭 드렉슬러는 분자 단위의 조립기술, 스스로를 복제하는 로봇 등 나노기술의 장밋빛 미래를 제시했다.

이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것은 공상과학영화에서와 같이 먼지보다 더 작은 기계장치(일종의 잠수함)가 몸 속의 혈관이나 세포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병균이나 암세포를 만나면 칼로 절단해버리거나 약물을 발사해 죽여버리는 시나리오다.

스몰리는 이러한 생각들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이러한 공상들이 일반 대중에게 섣부른 기대감과 그것들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에 실망감만을 안겨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재 초창기에 있는 나노과학기술이 과연 스몰리가 예상한 대로 매우 완만하고 연속적인 발전을 할 것인지 혹은 드렉슬러의 말대로 빠른 세월 안에 우리 생활을 획기적으로 변혁시킬 정도의 비약적인 발전을 할 것인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러나 앞서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같은 무게있는 자리에서 꿈과 같은 세개의 비전을 발표한 것은 그러한 목표 달성 가능성을 과학계의 주류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예를 들어 지난해 11월 크기가 1백나노미터도 안되는(머리카락 굵기의 1백분의 1 이하) 분자 발동기(분자모터에 의해 조그마한 날개가 회전하는 장치)가 실제로 발명돼 학술지에 보고되기도 했다.

국제학회에서 언제나 에너지로 가득찬 연설로 강한 인상을 주었던 스몰리는 좋지 않았던 건강을 최근 회복하고 대외활동을 재개하면서 나노기술에 대해 훨씬 더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스몰리가 그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던 나노테크놀로지는 이제 스몰리를 위시한 몇몇 거장의 손을 떠나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차원에서 국가가 관리하는 체제를 띠게 됐다.

*** 거대산업기술과 달리 친환경적

하지만 이것이 창의적인 개인의 발명.발견에 의해 기술이 발전한다는 사실을 변경시키는 것은 아니다.

좀더 넓은 시각에서 다시 볼 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나노과학기술의 기본정신은 20세기 전반기 거대 산업기술이 막대한 자원을 소모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하고 자원과 에너지를 절약하고 친환경적인 기술을 개발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역동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특징으로 하는 기술의 진보가 21세기에 와서 현대인의 다양하고도 세련된 욕구에 부응해야 하는 고도의 발전단계에 이르렀으며 과연 나노기술이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지는 전 세계의 창의적 두뇌에 의한 열린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임지순 서울대 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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