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 시집 'X-레이…'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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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를 훔쳐내며/김포에서 일산으로 달리는 길/가속기를 밟으며/서른을 넘어가는/너의 나이를 떠올린다. //이제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찬란했던 젖가슴에/어린애를 파묻은 채/너도 찬찬히/늙어가고 있으리라는 믿음//오래 남은 슬픔과/너무 낡아버린/추억의 갈피를/펼쳐 두어도 부끄럽잖은/편안한 단념이 길을 늘인다. //어디에도/녹색의 장원은 없고/기억들은 상한 케익 위에 곧추선다. /슬픔 없이도/또 한 계절을 넘기는 나이."

1986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허진석 시인이 두번째 시집 『X-레이 필름 속의 어둠』(다층,5천원) 을 펴냈다.

허씨는 이번 시집에서 위 시 '너의 생일을 기억하며' 일부에서 볼 수 있듯 '슬픔 없이도' 현대 도시문명을 잘 살아내는 듯한 중년의 쓸쓸한 내면 풍경을 드러내고 있다.

일상의 의미 없음, 무미건조함에 허씨는 이제는 상실된 추억을 떠올리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비록 아프고 무상할지라도 시쓰기이며 그래도 잘 살아내려는 의미 아니겠느냐고 묻고 있다.

이런한 허씨의 시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춘식씨는 "추억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이 훼손과 미련이라면, 그에 대한 그의 시적 진술은 일상성에 대한 부조리한 진술과 낭만적 미학주의로 규정된다"고 밝혔다.

"때로는 까치도/차에 치여 죽는다. /어제는 고양이, /그저께는 족제비, /출근길을 달리는 국도(國道) /오늘은 또 족제비. /부부가 죽고 나면/새끼들은 누가 돌보나. //매일 조심하면서/매일같이 기도한다. /좋은 데로 가거라, /좋은 데로 가거라."('김포시편 1'전문)

잃은 꿈, 추억이지면 아프게 다시 떠올리는 허씨의 도저한 낭만적 미학주의는 그의 시뿐 아니라 삶을 규정 짓고 있다. 위 시에서도 드러나듯 그러한 태도는 자신의 차에 치여 죽을지도 모르는 미물들에 대한 안녕을 빌뿐 아니라 우리 이웃의, 자신의 가족에 대한 따뜻한 마음씀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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