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국제표준 따기 한·일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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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의 영어회화 선생인 크리스 라이언(30)은 한국생활 초기 지하철역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지하철의 각 노선을 운영하는 지하철공사(1~4호선).도시철도공사(5~8호선).철도청(수도권 전철)의 표시가 서로 달라 헷갈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인천국제공항에 있는 식당.편의점 표지와 한국관광공사가 사용하는 표지도 제각각이다.

이처럼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내국인에게도 혼란스러운 '공공안내 그림표지(픽토그램)'의 표준화 작업이 한창이다.

산업자원부는 지난 9일 지하철.화장실.관광안내소 등을 가리키는 픽토그램 30종을 국내 처음으로 국가표준으로 제정한 데 이어 국제 표준화를 추진키로 했다.

최근 1백8종의 픽토그램을 만든 일본도 이를 국제표준으로 만들겠다고 선언, 2002 월드컵.베이징 올림픽 등 대형 이벤트를 앞두고 한.일간 표준 전쟁도 본격화하고 있다. 자국의 픽토그램이 국제표준으로 선정되면 지적재산권 수입도 올릴 수 있고 관광객 유치에도 긍정적인 등 경제적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 국내 표준화작업=그동안 공항.지하철.박물관 등에서 사용한 픽토그램은 모두 미국.영국.일본 등에서 사용하는 그림을 무단복제한 것들.때문에 항상 저작권 침해 가능성이 컸었다. 게다가 지하철의 예에서 보듯 픽토그램을 쓰는 공공기관.기업마다 서로 다른 표지를 사용했다.

이에 산자부 기술표준원은 지난해 말부터 픽토그램 표준화작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만들어진 30종을 포함해 모두 2백여종을 만들 계획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휠체어에 앉은 모습을 표현한 장애인 픽토그램의 경우 외국 것은 장애인의 손이 앞으로 가 있지만, 우리 것은 장애인 스스로 한다는 의미로 손이 뒤로 가 있다.

한국관광연구원의 허갑중 박사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픽토그램을 만들면 외국인이 표지만 보고 공공시설 등을 쉽게 찾을 수 있어 관광산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새로 정해진 국가 표준은 정부기관은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하며, 민간기업은 정부의 권고를 받게 된다.

◇ 한.일간 표준 경쟁=현재 사용되는 픽토그램의 국제표준은 국제표준화기구(ISO)가 1990년에 제정한 60여개. 그러나 경제규모가 커지고 생활환경이 달라지며 픽토그램의 확충 필요성이 높아져 개정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내년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형 픽토그램을 국제 표준으로 삼기 위한 로비에 들어갔다. 일본 픽토그램이 국제표준이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일본 규격을 따라야 한다.

이에 맞서 산자부는 지난 1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미국.스페인 등의 전문가를 초빙해 가진 국제 세미나에서 한국 표준을 공개하고 국제표준 경쟁에 뛰어들었다. 기술표준원은 내년에 미주(미국).유럽(스페인).아시아(중국) 등 문화권이 다른 3개 국가에서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국의 픽토그램 인식도 등을 실험 평가하고 국제표준화기구에 '표준시안'으로 제안할 예정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에 비해 크게 부족한 지원. 일본은 일본재단.소니 등 민간단체와 기업이 앞장서 지원해 산자부 예산을 쪼개 쓰는 우리보다 연구예산이 여섯배나 많다.

기술표준원 육근성 박사는 "앞으로 2~3년여의 테스트와 검토를 거쳐 ISO가 국제표준을 결정할 예정이기 때문에 한시바삐 민.관이 관심을 갖고 지원하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픽토그램이란=공공시설 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일종의 그림 문자. 그림(picto)과 메시지라는 의미를 갖는 전보(telegram)의 합성어. ISO는 나라마다 사회 환경이 다른 점을 감안해 종류에 따라 단일 표준보다는 2~3가지의 복수 표준을 정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김종윤 기자 yoo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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