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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감히’란 말은 더 이상 용납 못해 그것만도 신이 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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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강일구]

나 어릴 적. 여자애들은, 부서진 빨간 벽돌을 빻아 반찬 만들고, 조약돌로 떡을 해서 상을 차려놓고선 일하러 간 신랑을 기다리는 그런 소꿉놀이를 했다. 좀 자란 후엔 학교 가서 남자인 반장을 보필하는 부반장 같은 역할만을 맡았다.

 엊그제 처음 참석한 양평 한구석 작은 마을의 연말총회. 그곳에서도 예산 편성 같은 일다운 일을 하는 사람은 모조리 남자들이었고, 난 그저 식당에서 콩나물만 박박 무치다가 돌아왔다.

 매일 보는 바보상자 속의 메인뉴스. 거기도 남자 앵커는 중요한 뉴스를 전달하고 여자 보조앵커는 가벼운 화젯거리만 전달한다. 남녀의 특징을 고려했다 우긴다면야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오랫동안 바뀌지 않는 남자 앵커에 비해 여자 앵커는 왜 수시로 바뀌는 건가. 여자를 마치 양복 주머니에 꽂는 행커치프로 아는 건지.

 자라온 우리 집 분위기도 마찬가지. 삼촌 두 명에다 오빠랑 남동생들 틈에 여자라고는 달랑 하나인 집안에서 늘 여자답지 못하다는 꾸지람만 받고 자랐다. 꼭 해야 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러다가 시집은 갈 수 있을까’ 서로들 초조해하며 내 앞일까지 서둘러 걱정들을 했더랬다. 다행히 눈에 콩깍지 씐 남자 만나 결혼도 하고 완두콩 같은 애도 둘씩이나 낳았지만 말이다.

 그 시절에, 내 이름보다 더 자주 듣던 말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였다. 그런데 그 암탉들의 기가 살아나게 생겼다. 울던 암탉 중 하나가 나라의 수장이 된 거다. 반장도, 이장도, 회사 대표도 아닌 대한민국의 대표. 그것도 의원내각제도 아니고 막강한 권력의 대통령제 대통령이다.

 여성 대통령. 과연 잘 해낼까. 직장에서조차 여자를 상사로 모시는 남자 직원들은 부담스러워한다는데. 아마도 눈에 낯설어 그럴 게다. 나라 살림이나 집안 살림이나 다르지 않다. 국민 챙기는 것, 이웃과의 외교문제, 나라 씀씀이 조절, 힘든 자식 더 챙기듯이 소외계층 돌보는 것, 국민과의 소통과 대화, 정치인과 관료들과의 협동.

 다 문제없을 거다. 여자라서 안보와 위기대처능력이 좀? 불운의 경험이 누구보다 많은 박근혜 당선인. 피 흘리는 얼굴을 감싸 쥐고는 다음 유세 걱정을 했고, 총탄으로 쓰러진 아버지 옆에서 휴전선 걱정을 했다. 강한 원칙이나 신뢰를 중시하는 건 오히려 중성적인 성격이다.

 ‘돌봐야 할 가족도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다’는 본인 말처럼. 부디 접대문화를 포함한 뿌리 깊은 한국적 부패로부터 자유로운 ‘깨끗한 정부’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역대 여성 대통령이나 여성 총리에 대한 평가도 좋다. ‘신념의 정치인’으로 불리던 영국 대처 전 총리같이, 독일 기민당이 비자금 사건으로 위기에 처하자 비상시국을 타개하고 총리에 오른 메르켈같이. 부디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이제 더 이상 ‘여자가 감히’란 말은 안 듣겠다. 그것만으로도 신이 난다.

글=엄을순 객원칼럼니스트
사진=강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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