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바꾸기 어려운 '숫자' 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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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숫자와 더불어 산다. 기름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가을비는 얼마나 내렸는지 다 숫자 얘기다. 기본적인 숫자를 익혀야 생활이 덜 불편하다.

경제활동은 더욱 그렇다. 경제정책에는 많은 숫자가 등장한다. 특히 무엇을 규제할 때 숫자가 동원된다.

몇% 이내로 낮춰라, 몇%를 넘어서면 안된다며 일률적으로 적용한다. 숫자 선상에 있는 당사자는 애가 탄다. 뭔가 될 것 같은데 숫자에 걸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은행株 상한 왜 4%인가

이런 불만이 쌓이고 여건이 달라지면 숫자를 바꾸자는 이야기가 터져나온다. 더구나 숫자의 타당성이 떨어지면 그 정책의 무용론까지 대두된다. 요즘 한쪽에선 없애자, 다른 쪽은 안된다며 시끄러운 정책도 이런 속사정이 있다.그 숫자를 살펴보자.

은행법은 개인이나 법인이 가질 수 있는 주식 상한선(동일인 소유한도)을 두고 있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은행은 1950년대에 민간에 불하됐다.

61년 5.16 군사혁명과 함께 은행을 국유화했다. 80년대 들어 자본시장 개방이 거론되며 은행을 마냥 정부 소유로 두기 어려워 민영화를 추진했다.

민영화를 해도 재벌이 은행 경영을 좌우하지 못하도록 소유한도를 두기로 했다. 82년 당시 재무부는 10% 안을 내놓았다. 국회심의 과정에서 야당이 10%는 너무 많다며 5%로 하자고 우겼다. 정부.여당과 야당이 중간에서 절충했다. 중간이면 7.5%인데, 소수점은 보기 흉하다며 8%로 낙착됐다.

그 뒤 8%도 많다는 지적이 나오자 94년에 그 절반인 4%로 낮추기에 이른다. 십진법과 '딱 잘라 절반'을 좋아하는 우리네 인식이 은행의 경영권을 결정하는 기준을 이렇게 정한 것이다. 30대 그룹(대규모 기업집단)을 지정하는 데도 비슷한 일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계열사 자산총액이 4천억원 이상인 그룹으로 했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물가도 올라 이 기준에 해당하는 그룹 수가 87년 32개에서 92년 78개로 늘어났다. 그 숫자가 늘었다는 이유만으로 '독점자본의 경제력 지배가 심화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정부는 규제대상 그룹 수를 늘리는 게 실익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93년부터 자산총액 얼마 이상으로 하지 않고, 자산총액이 큰 곳부터 30등까지 끊기로 했다. 10,20,30 등 우리 국민들이 10진법을 좋아하는데 '30은 돼야 규제할 맛이 난다'는 담당 부서의 인식이 작용했다는 당시 관계자의 증언이다.

30이란 숫자는 다시 그룹 계열사의 출자총액을 순자산의 몇%로 제한하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86년 공정거래법을 바꾸면서 순자산의 40%를 초과해 국내 다른 기업의 주식을 갖지 못하도록 했다.

이때 40%로 한 것은 10대 그룹의 평균 출자총액이 순자산의 50%를 조금 밑돌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어떻게 따라올지와 다음에 다시 바꿀 것을 생각해 정한 것이다.

8년 뒤인 94년 다시 법을 고칠 때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재벌들과 논쟁이 벌어졌다. 35%로 하자는 재계 의견과 좀더 낮추자는 경제부처의 주장이 맞섰다.결론을 못낸 채 청와대에 보고됐다.

'통치권에 대한 도전'이란 말이 나왔고, 이를 전해들은 재계가 목소리를 낮췄다. 결국 확 낮춰 경제부처 안보다 낮은 25%로 정해졌다.

*** 규제 그룹 수 십진법으로

'4%'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공적자금이 투입돼 정부 소유가 된 은행을 민영화해야 하는 지금 국내 기업이 나서기 어려운 족쇄가 돼 있다.

'30대'는 4대 내지 5대 그룹과 나머지 그룹이 너무 차이가 나 문제가 많다는 이유로 도마 위에 올랐다. '25%'는 경기가 좋지 않은 판에 투자를 살려야 하는데 기업의 다른 투자를 막는 걸림돌로 지목되고 있다.

경제정책에 들어가는 숫자는 처음에 잘 따져 보고 정해야 한다. 느낌이나 관행으로 정했다가는 두고두고 멍에가 된다.

또 기업을 힘들게 하고 나라의 경쟁력을 좀먹는다. 그러니 기초 조사를 철저히 하고 현실과 장래의 변화를 예측해 숫자를 정해야 한다.

양재찬 경제부장 jay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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