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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 왕가 마지막 황후의 언저리-간택과 가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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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어린 윤 소녀는 그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진행되는거라 짐작했다. 으리으리한 대궐안 별당에는 자기와 비슷한 소녀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노란 저고리에 다홍치마 양쪽으로 갈라 금 댕기로 사쁜히 매어 올린 새앙머리.
「시종관 윤택영녀」라 붓글씨로 쓴 치마끈을 반드시 받쳐들고 제일앞장서 들어갔다. 자신을 유심히 살피는 방안의 어른들을 똑바로 볼 수는 없었지만, 수많은 눈을 이마에 느끼면서 서쪽 제일 윗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윤 황후가 두번째 세자(순종)비로 간택되던 날의 얘기다. 초간택은 3백여명, 두번째는10여명, 세번쌔는 3명의 처녀가 참석, 최후로 한명 세자비 윤씨가 간택된 것이다.
나라에서 황후나 세자비를 간택하려면 전국에 간택령을 내린다. 그 나이의 처녀들을 간택이 끝나는 한두달 동안 금혼케하고 재상과 양반 선비집 규수들의 단자를 미리 받고 3일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선을 보아 청한다. 윤 황후도 그와 같은 절차로 간택되었다. 윤 황후가 세자비로 간택되기까지는 그의 백부 윤덕영의 힘이 컸다.
미리 작정되고 교육과 훈련을 받았기 때문도 있겠지만, 윤 황후는 간택 때의 몸가짐이 다른 처녀에 비해 월등이 의젓하고 귀인다왔다고 흥친왕비 이씨(83세)는 윤 황후의 간택과 가례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윤 황후보다 13세 맏이인 흥친왕비는 윤 황후와 일생을 다정하게 지냈던 분이다. 지금은 운현궁에 기거한다. 흥친왕은 고종황제의 형님 이재면씨다. 간택된 윤 소녀는 그날로 대안동별실에 있는 감고당으로 들어가 한달이 넘도록 어른께 조석문안을 위한 큰절과 초보적인 궁중예절을 배웠다.
가례를 준비하는 궁중은 적이 들떠있었다.
고종황제는 어린 태자비를 위하여 비단과 금은패물을 하사하였고 비·빈과 귀인·숙원들은 아끼는 패물들을 다투어 바쳤다.
1907년1월24일, 몹시 추운 날이었다. 감고당 대청에 대령한 꽃가마 연문을 세자는 조용히 들었다. 큰 머리 용잠에 화려한 가례복으로 성장한 세자비 윤씨가 상궁들의 부축을 받아 연안으로 들어섰다. 두 상궁이 양옆에서 큰 머리와 옷깃을 받쳐 모셔 함께 탔다.
세자는 주렴을 내리고 은 자물쇠로 연문을 잠갔다.
연은 세자와 함께 별궁대전으로 나와 은 쇳대로 연문을 열어 화려한 가례를 올렸다. 이어 세자와 나란히 앉아 동자연장을 받았다. 그때 세자는 33세, 세자비 윤씨는 14세였다.
흥친왕비가 때때로 자신이 흥친왕과 결혼한 것은 도둑맞아오던 기분이라는 것을 윤 황후에게 아뢰면 그저 미소로써 대답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괴로울 정도로 엄숙하고 복잡한 예절과 무거운 머리 거추장스런 옷들이 14세 소녀 윤씨에게는 겨웠을 따름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신의 기구하고 고독한 일생이 시작되는 줄도 모르고. <J>
◇4면 발행 때만 3면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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