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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16만 시간 야생화만 찍을 건가 백수생활에도 품질 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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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소식이 뜸하던 지인이 갑자기 e-메일로 손수 찍은 야생화 사진을 보내오기 시작하면 ‘아, 이 친구도 백수가 됐구나’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나마 등산이 비용 덜 들고 사진 취미와도 어울리니 말이다. 외교관으로 오래 근무하다 정년퇴임한 조순행(67·전 주일대사관 참사관)씨도 퇴직 직후 ‘터진 수도관 물처럼 넘치는 잉여시간’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처음엔 그동안 적조했던 이들을 만났다. 몇 달 지나자 같이 놀아줄 백수 인맥도 고갈됐다. 다른 퇴직자들처럼 산행(山行)을 갈 때라고 느껴졌다. 부인과 근교 산에 갔다가 아침마다 골프 가방을 차 트렁크에 싣고 떠나던 앞집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골프는커녕 산에서 혼자 김밥을 먹고 있었다.

 퇴임 외교관 18명의 ‘제2의 인생’ 고백을 묶은 책 『외교 밖 현장에서』(외교통상부 간)를 지난 주말 재미있게 읽었다. 외교 관계자에게만 읽히기엔 아깝다는 생각이다. 조순행씨는 처음엔 오랜 꿈이던 칼국수집을 열려다 주변의 반대로 포기하고 이발학원에 다녔다. 봉사를 할 요량이었다. 방송통신대 일본학과에 편입해 졸업도 했다. 이용사 시험에는 번번이 떨어지다 3년 만에 여섯 번째 도전에서 합격했다. 요양원 봉사를 하다 보니 할머니들 머리 가꾸는 데도 욕심이 생겨 다시 미용학원에 등록해 여성 컷과 파마를 배웠다.

 모리타니아·중앙아프리카공화국·코트디부아르 대사를 지낸 김승호(75)씨는 아프리카를 오가며 모기장 설치 등 자원봉사에 열심이다. 덕분에 코트디부아르의 세 마을에서 명예추장이 됐다. 서현섭(68) 전 로마교황청 대사는 퇴임 후 좀 더 독하게 통과의례를 시도했다. 먼 옛날 고향인 전남 구례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단신 상경했던 추억을 되살린 것이다. 은퇴한 해인 2004년 12월 18일 아침 서울역 시계탑에서 출발해 고향으로 줄기차게 걸었다. 해 떨어지면 눈에 띄는 여관에 들어갔다. 불쌍히 여긴 주인할머니가 2000원을 쥐여준 적도 있다. 약 400㎞를 걸어 12일 만인 12월 29일 저녁 상거지 행색으로 ‘유년의 출발점’에 도착했다. 제2의 인생으로 외국(일본)의 교수직에 도전하기로 결심했고, 결국 꿈을 이루었다.

 서울 인사동 쌈지길에서는 보건복지부가 마련한 ‘은퇴 후 8만 시간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한 사진들을 전시(14~24일) 중이다. 에세이 부문 수상작들을 보면 정년을 앞두거나 이미 맞이한 기성세대의 불안과 열정이 동시에 느껴진다. 8만 시간은 60세 은퇴자가 80세까지 20년간 수면·식사 등을 빼고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대비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요즘 은퇴자는 100세까지 살 각오(?)를 해야 하니, 80~100세를 더해 무려 16만 시간이 큰 강처럼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다. 위기이자 기회다.

글=노재현 기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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