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이기백<서강대 교수·국사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대학생시절에 나는 대개 겨울을 음침한 이국의 동경에서 지내고 했다.
한국에 비하면 기온이 높은 편이건만, 흐린 날씨에 화롯불 하나를 부둥켜안고「다다미」방에서 지내는 겨울은 춥기만 했다. 그러다가 2월 하순경에 고향으로 돌아오면 아직 겨울 기분인 나에게 북국인 고향이 오히려 춘 색으로 맞아 주는 것이었다. 양지 바른 잔디밭에는 눈이 녹아 누워서 뒹굴기 알맞고, 땅속에서는 이미 파란 싹이 돋아 있고 하였다. 이 이른봄의 고향에서 즐기던 꿈 많던 젊은 시절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속에서 나는 따뜻한 생명의 힘에 접하곤 하였던 것이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누구에게나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듯한 포근한 기분에 잠기게 한다. 이에 대해서 제2의 고향이라면 이것은 느낌이 퍽 달라진다. 우선 성장한 뒤에 활동하던 타향을 생각게 한다. 그리고 그 고장 사람들과 맺어진 인정 어린 사실들을 노후에 회상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예컨대「헐벗」이나「베델」같은 사람에게 한국은 분명히 제2의 고향인 셈이다. 그들은 자기네의 뼈를 한국에 묻고 싶을 정도로 한국인과 따뜻한 인정 속에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제2의 고향이란 말을 이상하게 쓰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다. 일제시대에 한국에 와서 살던 일본사람들이 한국을 그렇게 부르는 경우 이다. 그들은 지배자로서 한국인을 억압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며 우월감에 도취해서 한국인을 멸시했었다. 요컨대 그들은 한국인의 우인이 아니라 적이었다. 그들이 한국에 대하여 느끼는 향수는 한국인과의 사이에 얽힌 애정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배자로서의 특권에 대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한국인의 벗인 것처럼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교언영색이 인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 것은 공자의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도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일본인 자신도 알고 있을 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