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는 토크쇼] '경계소설'은 21세기 나침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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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소설 출간을 전문으로 해온 열린책들이 최근 주목할 만한 기획물인 '경계소설 시리즈' 를 출간했다.

경계소설이란 '주류 문학과 비(非) 리얼리즘 계열의 SF.환상 소설 등의 융합을 시도하는 작품' 을 뜻하는 말. 또 다른 문학 장르를 정의하는 용어라기보다 소설적 경향에 대한 기술(記述) 적 개념이다.

시리즈 첫 권으로 나온 로버트 홀드스톡의 『미사고의 숲』과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등 두 권의 소설은 영.미 문학계에서 문학성과 오락성 모두에서 후한 점수를 받은 작품이다.

실제로 『미사고의 숲』은 영국작가협회상.영국SF협회상.세계환상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이 책의 번역자이자 SF 평론가인 김상훈씨는 "경계소설은 특정 창작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은 문화적인 현상인 동시에 장르 소설 특유의 방법론적 구속을 받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21세기 소설이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고 평가한다.

평소 웹진 등에 팬터지 문학에 대한 글을 기고했던 소설가 송경아씨는 "이제야 한국 문학에서 환상 문학의 전통을 되살리고 환상 문학의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는 시기가 됐다" 며 "환상 문학의 수준을 높여준 책들이 번역되는 것은 그 자체로 반가운 일" 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사회〓독자와 역자 입장에서 두 소설에 대한 총평부터 해보자.

송경아〓『미사고의 숲』에선 SF소설 장르 안에서의 독특함보다 문학성이 더욱 강력하게 느껴졌다. 이미지를 깁는 과정이 아주 인상적인 소설이다. 혈족 살해나 소녀찾기와 같은 상당히 오래된 모티브를 가지고도 호소력을 잃지 않게 하는 작가의 능력이 탁월했다. 신화적인 소녀가 할리우드 영화의 연약한 여인처럼 묘사되기 시작하면 한없이 우스워지기 십상인데 소설 속 소녀인 귀네스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한다. 『미사고의 숲』이 환상적 내용을 리얼리스틱하게 그렸다면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영국식 슬랩스틱 코미디같은 유쾌함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김상훈〓『미사고의 숲』은 신화의 개인화를 다루고 있다. 감정이입할 수 있는 개인이 신화를 만들어 가는 형식이 매력적이다. SF소설 측면에서 보자면 뻔하게 예측할 수 있는 장르의 전형성에 피와 살을 보태준 것이라고 할까. 그런 측면이 장르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도 다가설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순수 소설과 SF.환상 소설 등의 장르 소설이 양분된 한국적 현실에서 장르 소설에도 훌륭한 작품이 있다는 점을 인식시킬 수 있을 듯하다.

사회〓그런 두 진영 사이의 화해 혹은 융합을 뜻하는 경계소설이 영.미 문학계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나 궁금하다.

김상훈〓서구의 경우 순수 문학과 장르문학 사이의 경계가 한국처럼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다. 일전에 한 문학평론가가 순수 문학의 입장에서 해외 SF소설을 읽고 비평한 글을 본 적이 있다. "효용도 있고 재미도 있지만 문학적으로 의미는 없다" 는 취지의 결론이었는데 '장님이 코끼리 다리 더듬는 격' 으로 느껴졌다. 원전이 될 만한 문학성있는 장르 문학이 소개 되지 않았고, 그런 정보 부재에서 오는 단견이 아닐까 싶다. 특히 리얼리즘.모더니즘에 입각한 전통 소설의 한계를 절감한 작가들이 오늘날 일상생활의 필수적 요소가 된 테크놀로지에 전통적 환상을 접목시킨 경계소설은 소설의 문학성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하게 한다.

송경아〓1990년대 일상성에 몰두한 소설들이 나온 이후에야 장르 소설들이 자리를 잡을 토양을 갖게 됐다고 본다. 일종의 균형을 잡은 것이랄까. 독재를 겪으면서 소설도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응전이냐,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미학적 자율성이냐 이 두 가지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자의 경우도 '이건 내 얘기다' 라는 자기 동일시가 소설을 가늠하는 기준이 됐던 거다. 감정이입의 능력을 배양할 수 없었던 지적.사회적 토양 속에서 소설을 즐긴다는데 익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사회〓한국 사회에서 소설은 영상 매체 등에 눌려 갈수록 독자도 줄고 예전의 권위를 잃어가고 있다. 삶의 의미를 찾고 교양을 얻는다는 순수문학과 기호와 소비품으로 인식되는 장르 소설 사이에서 경계소설이 하나의 대안, 혹은 소설 쓰기의 전범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김상훈〓한국 소설에선 존재할 가능성이 없는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끌어가는 힘을 가진 작품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L G 융이 얘기한 '종교성' 처럼 신화나 민담으로 대표되는 '환상성' 에 대한 기본적인 갈망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소설에서는 중세와 근대를 잇는 환상 문학의 맥이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다. 한국 소설사나 한국적 팬터지 소설에 대한 체계적 연구와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서구의 경우 플롯의 폐기, 환유.은유 등의 상징을 중시하는 현대 지식인 소설이 독자들에게 외면당하는 현실을 뛰어넘기 위한 크로스오버적인 시도가 보편적이다.

송경아〓환상 문학은 아직 틈새시장에 불과하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소설 자체가 틈새 시장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순수' 문학의 경우 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교양인들이라고 생각하고 한국 팬터지 문학의 작가들은 그냥 즐길 수 있는 소설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는 소설 내적이라기보다 문학 교육과 같은 외적인 요소가 더욱 중요함을 의미한다. 교육이 고교과정까지 최소한 8백권 정도의 다독을 보장해주고 한국 문학사의 전통 속에 작가와 독자를 위치시켜 줄 때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볼 수 있을 듯하다. 팬터지 문학 붐을 일으킨 작가들이 문학성을 차치하고라도 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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