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에 물렸을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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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호랑이가 두 마리 나타났다. 한 놈은「뉴요크」에, 또 한 놈은 서울 한복판에,「샌터클로즈」도 좋고, 「호텔」예약도 좋지만, 두 가지 큼직한 일이 빗나가고 있다. 벌써 호랑이에 물린 거나 다름없고 속담대로 정신을 차려야 산다.
평화 통일안이 60표 이상의 찬성을 얻어서「만족한다」고 우리 대표가 말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 할 수록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통일안에 대한 찬성표가 줄어들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래서 중립국과도 사귀고 무서운 속도로 세계 도처에 공관을 열고 초청외교라는 것도 해 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안건이 회기 맨 끝날 자정 넘어서 표결됐기 때문에 각국 대표들이 지쳐서 그만 그 모양이 됐다고 얼버무리기엔 국제정세라는 호랑이의 이빨이 너무나 사납다.
그렇다면 연례 행사 적인 상정을 지양하느니「새로운 포석」이니 하고 어렵게 얘기하지 말고 그 호랑이의 체질이며, 성향이며, 이빨의 수효며를 사실대로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과 더불어 호구를 빠져날 길을 논의하는 것이 옳다.「징글벨」소리와 함께 서울의 거리에 나타난 징그러운 호랑이는 우리네 살림살이의 각박함. 우리가 들어온 바로는 나라의 경제기반이 반석같이 확립됐고 개인소득이「유엔」에서의 찬성표수와는 반대로 해마다 눈부시게 늘어나서 멀지않아 태평성세를 구가할 판이었다. 그런데도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여전히 쪼들리고 번영의 영장은 간 곳이 없었다. 그러나 부풀어만 가는 PR와 오므라들기만 하는 호주머니 사이의 냉가슴 앓이를 약간 풀어주는 소식이 있다.
경제 과학심의회의의 보고서가 그것이다. GNP가 뭐고 간접자본이 어떻고 하는 얘기는, 밤낮 들어봐도 무슨 소린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문제를 다 잘 알고, 연구도 많이 한 분들이 올해의 생산량이 작년만 못하고, 소비물가는 5년 전의 두 배로 뛰어서「실질적인 국민생활 향상은 없었다」고 판단해 준 것이다. 들어서 배가 부르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경험과 합치하는 말이어서 속은 시원하다.
잘된 일은 덮어두고 잘못한 일과 잘 안 되는 일을 국민에게 털어놓고 국민과 더불어 걱정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제도의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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