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무죄? 정부 급발진 발표에 소비자 부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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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자동차 사이트에는 급발진 사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운전자의 하소연이 꽤 많다. 이들은 피해자를 넘어 사고 가해자로까지 취급받으면서 정신적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진은 운전자가 “주차 중에 급발진 현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한 그랜저(TG) 사고 모습. 급발진은 주정차 상태는 물론 주행 중에도 일어날 수 있다. 오른쪽 사진은 주행 중 일어난 급발진 추정 사고. [뉴시스]

자동차 운전자들은 종종 신문·방송을 통해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 현장을 접한다. 처참하게 부서진 차량에 “액셀(가속 페달)을 밟지 않았는데도 미친 듯이 질주했다. 브레이크는 소용이 없었다”는 사고 운전자들의 절규하는 목소리가 더해진다. 그럴 때마다 “내 차도 급발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대부분 해봤을 게다.

 최근 국토해양부가 발표한 급발진 조사 결과 발표를 두고 네티즌과 소비자단체가 들끓고 있다. 관련 기사가 게재된 대형 포털사이트와 자동차 관련 사이트에는 “정부가 업체 편만 든다. 소비자는 언제나 봉”이라는 비판성 글이 수백 개씩 달려 있다. 소비자들의 화가 치민 것이다.

 국토부는 올해 5월부터 민·관 합동조사반이 진행해온 급발진 주장 사고에 대한 조사 결과를 지난달 21일 발표했다. 결과는 모두 ‘자동차는 무죄’였다. 급발진 증상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국토부는 소비자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과학적 분석을 들고 나왔다. 자동차의 사고기록장치로 불리는 ‘EDR(Event Data Recorder)’ 조사 결과다.

 무엇이 소비자들을 화나게 한 것일까. 취재팀은 지난 일주일 동안 한국자동차공학회·자동차공업협회 등 주요 자동차 관련 단체와 학계 전문가 10여 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모두 급발진 얘기만 나오면 손사래를 쳤다. 실명을 원치 않는 것은 물론 급발진 원인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럴 만했다. 자동차가 잘못 만들어진 게 문제라고 지적하면 당장 자동차 회사의 타깃이 된다. 거꾸로 운전자 과실 가능성이 크다고 언급하면 바로 소비자들의 원성을 사게 된다.

 하지만 이들 전문가 집단이 공통으로 제시한 것에 시사점이 있었다. 자동차의 급발진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동안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혀온 전자파에 의한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뒤집는 얘기다.

그 근거로 자동차 업체들이 엔진 관련 전자장비를 거의 쓰지 않던 1970년대에도 급발진 사고가 있었다는 점과, 자동차 업체들이 신차를 개발하면서 수만 배 강한 전자파를 엔진 관련 전자회로(ECU)에 쏘이며 시험을 한다는 점을 들었다. 미궁에 싸인 급발진 원인 분석은 가능한 것일까.

EDR은 만능 사고기록장치?

 이번 국토부 발표의 핵심은 EDR 기록 분석이다. EDR은 말 그대로 ‘이벤트’를 기록하는 장치다. 여기서 말하는 이벤트는 자동차에서 일어나는 사고다. 그중에서도 에어백이 터지는 수준의 격한 사고만 기록한다. 결정적인 이벤트가 발생해 에어백이 터지기 전 대략 5초 동안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었는지, 브레이크는 밟았는지, 엔진 회전수를 올리는 흡기 장치는 제대로 작동했는지 등을 기록한다. EDR의 이런 능력 때문에 전문가들은 ‘사고기록장치’라는 감투를 씌워줬다. 항공기 블랙박스처럼 사고 조사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을 거란 생각에서다.

 하지만 EDR은 그리 대단한 장치가 아니다. 이 장치는 에어백 제조사가 만든다. 충돌사고 때 에어백이 제대로 작동했다는 걸 입증해 책임을 피하려 만든 것이지 애초 사고 조사와는 무관하다. 불과 5초를 기억해 정보량도 숫자 몇 개다. 아직까지 규격화도 돼 있지 않다. 미국에서는 올해 4월 2015년부터 의무장착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이를 위해 데이터 표준화 작업에 한창이다. 하지만 한국은 감감무소식이다.

 EDR은 표준화가 안 돼 정보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살짝 브레이크에 발만 올려놔도 브레이크를 밟은 것으로 인지할 정도다. 특히 에어백이 터져야 작동하기 때문에 에어백이 터지지 않은 ‘급발진’ 사고에서는 아예 무용지물이다. 또 딱 5초만 기록하기 때문에 10여 초 전에 급발진된 상황은 알 수 없다. 올여름 발생한 대구의 급발진 사고는 급발진부터 사고까지 13초가 걸렸지만 마지막 5초 기록으로 판결이 내려진 상태다. 운전자는 줄곧 “브레이크를 밟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아 핸들만 잡고 사고를 피하다 결국 충돌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런 EDR에 의존해서 급발진 사고를 규명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부분의 EDR은 액셀을 밟았는지 직접 체크하기보다는 액셀과 연결돼 있는 흡기 장치의 개폐 여부를 기록한다. 하지만 급발진 사고 당사자들은 “밟지도 않았는데 엔진이 굉음을 울리며 윙윙거렸다”고 진술한다. 그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액셀을 밟지 않았는데도 흡기 장치가 열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즉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스프링으로 작동되는 흡기 장치가 열렸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급발진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다.

 197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보고되기 시작한 급발진 사고는 아직도 암과 같은 불치병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도 나섰지만 이렇다 할 처방전을 만들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매년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가 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급발진 추정 사고는 지난해 241건, 올해는 8월까지 192건이 접수됐다. 이 중 몇 건에 대해 EDR 분석자료를 기반으로 원인 분석이 이뤄졌지만 명쾌한 결론이 나온 건 아니다.

급발진이 대중화된 계기는

 급발진은 1986년 미국 CBS의 시사 프로그램인 ‘60분’에서 ‘통제 불능’이라는 제목으로 아우디의 중형 세단 ‘아우디 5000’을 고발한 게 대중화의 시작이다. 당시 인기 차종이었던 이 차가 의도하지 않은 가속으로 사고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이 차로 친 오하이오의 한 여성도 인터뷰했다. 이 여성은 “사고 이유가 알 수 없는 차의 결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각 아우디 피해자 모임이 결성됐고 아우디가 결함을 해결하라는 압력이 커졌다.

 아우디는 자체 조사를 한 뒤 ‘운전자 조작 실수’로 몰아갔다. 이는 고객들에게 심한 배신감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아우디는 판매가 급감하면서 미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그러자 미국 정부가 나섰다. 조사팀은 아우디가 브레이크와 액셀을 가까이 배치해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잘못 밟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후 자동차 업체들은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야 시동이 걸리고 기어 변속이 가능한 ‘시프트 록’ 장치를 개발했다. 이 장치는 1990년대 이후 모든 자동변속기 차량에 의무적으로 달렸다.

 최근엔 차량 블랙박스가 널리 보급되면서 급발진 원인 규명에 속도가 붙고 있다. 이 장치는 지난해 100만 대를 돌파한 뒤 올해만 200만 대 이상 팔릴 전망이다. 2015년이면 국내 승용차의 절반 이상이 블랙박스를 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더구나 요즘 블랙박스는 차량 전면뿐 아니라 좌우 주행 모습과 실내 영상까지 녹화한다. 일방적인 운전자의 과실로 몰렸던 급발진 의혹이 블랙박스로 규명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다.

김태진·주경돈 기자
도움말=장진택 카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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