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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성장’의 중심, 벤처는 잘 크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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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남민우
벤처기업협회장
다산네트웍스 대표

지난달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제2의 벤처 붐을 맞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최근 몇 년간 벤처기업 인증업체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발표했다. 벤처 붐이 절정에 달했던 2001년에도 전체 벤처 인증기업 수가 1만1000개였는데 최근 2만7000개까지 증가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타당한 지적이다. 현재 벤처 인증을 받고 있는 기업들은 기술보증기금으로부터 대출용 기술보증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벤처캐피털에서 투자를 받거나 연구개발(R&D)비 비중이 높아 R&D 기업으로 인증 받은 경우는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다. 오늘날 벤처캐피털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벤처 부흥을 위해 만들어진 코스닥시장마저 벤처 등용문의 기능을 상실한 채 코스피 시장의 제2중대 신세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정말 벤처 붐은 없고, 벤처는 사라진 것일까. 실상은 그렇지 않다. 1990년대 중반 씨앗이 뿌려지고 성장해 온 벤처들은 2001년에 터진 거품 붕괴의 호된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게 성장을 지속해 왔다. 이를 단적으로 실증하는 자료가 1000억 벤처 기업의 수다. 2011년 말 기준으로 연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벤처 수는 무려 381개에 달한다. 2005년 처음 조사를 시작할 때 68개였던 것과 비교해 보면 비약적으로 그 수가 증가했다.

 이들 1000억 벤처의 총 매출은 78조원에 달해 재계 순위 6위에 해당하고, 고용 인원은 13만 명에 이른다. 또한 벤처 전체로 보면 총 180조원의 매출을 일으키고 66만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재계 1위인 삼성그룹 다음으로 큰 집단이다. 그러니 벤처는 대기업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고 하겠다.

 벤처는 매출 성장률과 고용 증가율이 일반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에 비해 높다. 평균 고용자 수도 일반 중소기업이 4명인 데 비해 벤처기업은 6배 이상 많은 25명으로 일자리창출 효과가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나 향후 우리 경제가 지향하는 일자리 창출형 경제 성장을 위한 대안으로서 벤처의 역할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화려했던 벤처 전성시대가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진 사이 벤처 업계는 명실상부한 한국 경제의 주춧돌로 성장해 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 정책은 ‘대기업’과 ‘성장’이 중심이라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대기업들은 정부 지원이 없더라도 성장 산업이라고 판단되면 자체적으로 R&D 비용을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하지만 15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국가 R&D 지원 자금 가운데 10% 안팎만이 중소기업으로 흘러갈 뿐이다. 조세 감면 혜택도 대기업에 집중돼 있으며, 한 해 50조원이 넘는 정부 조달시장 역시 절반 이상이 대기업에 편중돼 있다. 대기업이 잘되면 낙수 효과에 의해 중소기업도 잘될 것이라는 기대는 빗나간 지 오래다.

 최근 국내에서는 무조건적인 성장이 아니라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착한 성장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성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는 성장의 질을 따져볼 때가 됐다는 뜻이다.

 이제는 대기업 위주 정책에 가치관의 변화와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야 할 시점이다. 정부는 일자리 창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중소·중견·벤처 기업의 육성과 성장에 초점을 맞춰 대기업에 편중됐던 예산을 적절히 재분배하고 관련 규정을 재정비해야 한다. 에인절 투자자 양성, 패자부활전을 막는 연대보증제 폐지, 벤처 인증제도 개선 등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

 정부 조달시장 정책 또한 장기적인 안목에서 전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난 시절 예산 절감이란 명목으로 정부 부처에서 사용하던 소프트웨어(SW)를 자체 개발, 대체함으로써 국내 중견 SW 업체들을 도산시켰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SW와 정보기술(IT) 업계 일자리를 없애 예산을 절감해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이란 명목으로 11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예산을 집행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다시 바라보고, 정부 조달시장 정책을 전체 산업 논리로 재설계해야 한다.

남 민 우 벤처기업협회장·다산네트웍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