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구원을 찾아서 영화 ‘나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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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무슨 꿈을 꿨더라? 언젠가부터 지난 밤의 꿈을 전혀 기억할수 없게 되었다. 특별하게 기억할만한 내용도 아니고, 그 꿈의 장면들을 굳이 상기할 이유가 없어진 탓일 게다. 가슴아픈 내용이라면 더 그렇겠지... 영화 ‘나비’는 마치 꿈속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한편의 영화로, 하나의 기억으로 복구해내려는 작품처럼 보인다. 그안엔 쓰디쓴 기억을 끝내 깨끗하게 세탁하고픈, 혹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나비’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아프고 상처받았음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굳이 외부로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는다. 가끔씩 눈물을 흘리고, 가끔씩 쓸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마치 꿈속이 아닌, 현실의 우리들이 그렇듯.

‘나비’는 조금 불행한 영화다. 국내에서 관객을 만나기 전에, 그리고 평가를 받기 전에 해외에서 먼저 호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로카르노 영화제를 비롯한 해외영화제에서 ‘나비’는 수상을 비롯해 화제작으로 거론되고 있다. ‘나비’는 장편데뷔작 ‘이방인’을 만든 문승욱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작업이다. 폴란드 국립영화학교에서 연출공부를 한 그는 어느 인터뷰에선가 “최근 한국영화는 사실적인 대사나 상황을 리얼리즘으로 오해하는 것 같다. 새로운 리얼리즘을 추구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바 있다. 몽환적인 장면이나 상황이 화면에 넘쳐나지만, 그것을 통해 인간 내면의 황폐함이라는 땅에 도달하고 있는 영화 ‘나비’를 통해, 우린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비’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영화다. 그런데 기존의 장르물과는 접근방식이 조금 다르다. 이 영화는 문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시공간을 거쳐 ‘상처와 기억’의 문제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영화에서 안나는 유키라는 가이드를 만난다. 안나는 아이를 낙태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며 망각 바이러스를 통해 기억을 잊고 싶어한다. 유키는 납중독이 된 상태임에도 뱃속의 아기를 포기하지 않고, K는 과거를 잃은 탓에 자신을 기억하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한다. 망각의 바이러스를 나비가 인도하고, 세명이 가는 곳엔 산성비가 내려 때로 기억과 싸우고 있는 이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나비’는 방황의 정서를 간직하는 영화다. 영화 내내 안나 등 세명의 인물들은 기억을 머릿 속에서 삭제해줄 망각 바이러스를 찾아서, 혹은 기억의 끈을 붙잡기 위해 애쓴다. 지하에서 물속으로, 그리고 차가운 샤워실 등의 공간을 차례로 누비면서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들이 간직한 ‘무엇’인가와 열심히 싸운다. 다시 말해서 ‘나비’는 자기치유를 위해 여러 공간을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쉽고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문승욱 감독은 영화에서 꿈결같은 장면을 여럿 선보인다. 푸른 물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 하늘에서 땅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빗줄기, 그리고 어슴프레하게 포착되는 도심의 허공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기준으로 보면 영화 서사는 정연하거나 깔끔한 감은 덜하지만, 차가운 듯 풍성한 이미지의 세례는 영화 주제와 정확하게 맞물리면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나비’에서 만날 수 있는 이미지의 향연은 최근 여느 한국영화에서 볼수 있었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종류의 것이다.

같은 점에서 ‘나비’는 디지털영화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이다. 이 영화의 매력이 ‘디지털’이라는 매체에 많이 기대고 있는 것도 사실. 다큐멘터리적인 구성과 드라마, 그리고 나레이션과 대사가 적절하게 교차하면서 어느새 영화 ‘나비’는 극영화의 경계선까지 손을 뻗는 과감함, 그리고 새로운 미학의 영토를 개척하려는 야심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디지털과 저예산을 고집하는 작가정신의 행복한 만남이다. 배우 연기도 주목할만하다. 김호정, 강혜정, 장현성 등 연극무대와 TV 드라마 등에서 활동했던 배우들이 모여 영화에서 어느 정도 서로를 증오하지만, 결국엔 상대를 그리워할 수 밖에 없게되는 인물을 연기해 앙상블을 이뤄내고 있다.

영화를 통해 ‘재미’를 얻겠다는 집착을 잠시 걷어낸다면 ‘나비’는 충분히 공감할만한, 그리고 그 세세한 의미들을 마음으로 이해할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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