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지식산업 '약속의 땅' 파주 북시티의 출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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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 수도권에 대규모 단지를 구상하던 한 협동조합이 단지 내 샛강(총길이 3㎞)매립을 전제로 한 개발계획을 돌연 거부하고 나섰다. 관례에 따라 샛강 매립안을 제시했던 토개공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생태계 우선이라는 명분이야 좋은 얘기지만 샛강을 살릴 경우 조합이 떠안을 땅값 상승 등 손실액만 2백억원이었다. 조합은 이런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런 의사를 관철시킨 그 조합은 과연 별났다.

지난해 샛강 옆에 멋스런 한옥 한 채을 척 하니 들여 놓은 것이다. 생각해보라. 한국통신이 선포한 국내 첫 사이버 드림타운이 이 단지인데, 그 첨단 공간에 자리잡은 고옥(古屋)의 운치라니….

문제의 한옥은 전북 정읍에서 어렵사리 해체 복원해 놓은 것이다. 자유로가 지나가는 경기도 파주의 심학산 옆 48여만평이 문제의 단지다. 요즘 세상의 인심과 거꾸로 가는 조합은 파주출판단지다.

89년 이후 집행부가 한번도 바뀌지 않았으면서도 15년째 잡음없이 일을 추슬러온 이 조합은 몇해 전 건축가들과 함께 '위대한 계약서'라는 문건을 발표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딱딱한 실무 계약서 대신 이들은 '생태도시에 대한 연대' '꿈과 예절이 넘치는 삶의 동네 구현'을 명문화한 것이다.

95년 국가산업단지 지정을 받아낸 그 단지는 볼썽사나운 '묻지마 개발'과 너무도 다르다. 때문에 문화인프라 모델로 연구대상 감인데, 알고보면 그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문화적 성숙도를 일정하게 반영한다.

다음 비화 한 토막만 해도 그렇다. 94년 심학산 현지에서 정부와 군사 관계자의 합동회의가 열렸다. 산 밑에 출판단지가 들어서면 수도권 방위업무 수행에 문제가 있는지를 검토하는 모임이었다.

헬리콥터로 벙커에 찾아든 장성들만 7~8명. 갑론을박이 치열했던 이 회의에서 '노!'할 경우 지구촌의 유명 책마을들인 헤이 온 와이(영국 웨일스) 레뒤(벨기에)와 또 다른 도시형 출판도시는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분위기가 썩 좋지 않지만은 않았다. 묵묵히 회의를 참관하던 김도현 당시 문체부 차관이 나섰다. 그가 김영삼 문민정부의 문화주의를 강조하고 군의 전향적 이해를 당부했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다시 머리를 맞댄 회의 끝에 어렵게 동의가 나왔다. 문화 우선주의로 출판도시가 극적으로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다음은 왜 출판도시가 '정신의 공학(工學)'이어야하나를 웅변하는 조합 이사장의 발언이다.

"때로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닌가 하고 자문할 때가 있습니다. 막가는 경제논리로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출판단지는 공동선을 추구하고, 이상을 구현하는 통로여야 합니다. 도시를 건설할 때도 환경의 표준화 운동을 벌이고, 이를 통해 우리 시대의 나쁜 징후(개발논리 등)를 극복하는 모델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기웅 지음 '출판도시를 향한 책의 여정',눈빛)

요즘 이 파주 북시티(공식 명칭)가 활기있게 움직이고 있다. 이미 끝낸 기반공사를 토대로 한길사 등 출판사.인쇄소 7곳이 선발대로 얼마 전 이주를 마쳤다. 따라서 파주 북시티가 이미 사실상의 가동에 들어간 상태다.

여기에 이 도시의 심장부인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가 모습을 드러낼 경우 국내 지식산업인 출판은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생각해보자. 유럽의 헤이 온 와이는 인구 1천여명의 한촌이다. 레뒤 역시 주변과 절연된 숲속이다. 파주시티는 6백개 출판사.관련 단체가 들어서는 신도시다.

출판 물류를 해결하는 초대형(건평 1만6천평) 유통센터까지 갖췄고, 이런 출판도시는 통일동산과 임진각을 잇는 남북교류의 중심에 들어서 있다. 또 있다. 자전거로 10분거리인 배후도시이자 문화마을로 주목받아온 '헤이리'를 염두에 둬보라.

제조업 이상의 제조업인 출판업이 2003년 이후 이 나라의 문화에 기여할 대목에 대한 기대에 찬 흥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한국의 어제 오늘을 상징하는 것이 경부고속도로와 울산공단쯤일까요? 앞으로 사람들은 파주시티를 기억하게 될 겁니다." 한 중진 출판인이 들려줬던 말이 허언(虛言)으로 들리지 않는다. 파주 북시티의 사실상 출범을 거듭 축하한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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