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모토의 독집앨범 「파시오나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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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본인 음악가들은 제대로 된 평가를받지 못하고 있다.

수 년 전 일본의 신동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가 내한연주회 등을 통해 반짝 관심을 끌긴 했으나 그것도 오래 가진 못했으며 서구에서는 이미 거장 대접을 받고 있는 오자와 세이지나 우치다 미츠코같은 음악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시모토 다이신(22)도 마찬가지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은 한국에서 장한나, 장영주가 일으키고 있는 신드롬에 못지않다.

197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가시모토는 1993년 런던에서 열린 제6회 메뉴힌국제 주니어 콩쿠르, 94년 쾰른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96년 빈에서 열린 프리츠 크라이슬러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같은 해 파리에서 열린 롱-티보 바이올린 콩쿠르등을 모두 석권하며 세계 바이올린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얼마 전 소니 뮤직과 전속 계약한 가시모토는 20세 되던 해인 99년 베토벤과 프로코피에프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수록한 데뷔 앨범 「데뷔」를 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 내놓은 두번째 앨범 「파시오나타」(소니)는 일본과 유럽에서열광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이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의 뛰어난 재능을 엿볼 수 있는곡들로 구성돼 있다.

비교적 덜 알려진 풀랭크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그보다는 좀더 자주 연주되는 그리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다단조 작품 45」,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소나타의 하나인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가장조」 등 3곡을 수록했다.

비교적 낯선 곡에서부터 아주 잘 알려진 명곡까지 골고루 녹음한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43년, 요절한 프랑스 출신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지네트 느뵈(1919-1949)에게 헌정된 풀랭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스페인 내전 때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한 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작곡된 곡이다.

고전적인 구조 속에서도 그 스스로 열광적인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동했던 풀랭크의 반(反)파시스트 정신을 담고 있다.

그리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다단조」는 낭만주의 시대에 작곡된 바이올린 소나타중 최고 걸작의 하나로 꼽히는 곡으로 열정적이면서도 시적 감수성이 자유롭게 표현된 주제 선율과 노르웨이의 민속적 색채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알레그로 몰토 에드 아파시오나토의 지시말이 붙은 1악장의 열정적인 제1주제와알레그로 에스프레시보 알라 로만자의 낭만적인 2악장, 가벼운 제1주제와 가곡같은제2주제의 대조가 매력적인 3악장으로 구성돼 있다.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가장조」는 프랑크가 남긴 유일한 바이올린 소나타로 19세기 프랑스 바이올린 음악의 대표작이자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있는 작품이다.

카논(canon) 형식의 전형을 보여 주는 유명한 4악장뿐 아니라 각 악장 전체가심오한 종교적 지성과 아름다운 감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형식적 통일감으로 충만해 있다.

가시모토의 연주는 놀랍다. '이렇게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가 일본에 있었다니...'하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올 정도이다.

그의 연주는 22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서적 깊이와 곡 해석력을보여 준다.

유려한 프레이징과 세련된 루바토, 섬세한 비브라토의 완급조절, 완벽한 테크닉등은 이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이미 대가의 반열에 들어섰음을 느끼게 한다.

피아니시모에서의 극도로 섬세한 표현력과 포르티시모에서의 강렬하면서도 절제된 몰입은 가시모토의 뛰어난 재능과 탁월한 지성을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의 바이올린 소리는 유난히 깊고 풍성하면서도 비단결같이 부드러운데 이는아마 그가 일본음악재단이 그에게 대여해 준 명기(名器) '주피터'(1722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타마르 골란의 피아노 반주는 예술적 표현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모범적이면서도 안정감이 있는 쪽이어서 반주자가 좀더 예술적으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면가시모토의 연주가 더욱 휘황한 빛을 발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다.

가시모토는 지난 1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7인의 음악회'에 출연,정명훈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하기도 했었는데그 때 보여준 놀라운 재능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이 음반은 증명한다.
(서울=연합뉴스) 정 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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