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中 귀환한 75세 리쭝런, 27세 미녀 간호사와 혼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99호 29면

1933년 후디에는 상하이 명성일보(明星日報)가 실시한 ‘영화황후’를 뽑는 선거에서 2만1333표를 얻어 초대 영화황후에 당선됐다.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후디에(앞줄 왼쪽 넷째). 셋째 줄의 털모자 쓴 사람(오른쪽 둘째)이 유명 경극배우 매이란팡(梅蘭芳). [사진 김명호]

1948년 12월, 내전 승리를 목전에 둔 중공은 전범 명단을 발표했다. 1번이 장제스(蔣介石), 2번은 한때 총통대리를 지낸 전 국민정부 부총통 리쭝런(李宗仁·이종인)이었다. 중공정권 수립 2개월 후 리쭝런은 대륙을 떠났다. 16년간 미국과 유럽을 유랑하며 타이완의 장제스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98>

1960년, 타향에서 칠순 잔치를 치른 리쭝런은 고향이 그리웠다. 인편에 ‘落葉歸根(낙엽도 결국은 뿌리로 돌아간다)’, 네 글자를 베이징 측에 전달했다. 중공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서로 으르렁거린 시절이 있었지만 한때는 북벌과 항일전쟁을 함께 치른 동료였고, 어려울 때 신세 진 일도 많은 사이였다.

귀국을 허락하려면 사면령부터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한마디로 묵살했다. “별걸 다 기억한다. 이미 지난 일이다. 시시콜콜 따지다 보면 머리만 복잡해지고 되는 일이 없다. 귀국하면 하고 싶다는 거 다 해줘라.”

5년 후, 부인 궈더제(郭德潔·곽덕결)만 데리고 귀국한 리쭝런은 전국을 유람하며 총리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전세기를 타건, 뭘 하건, 1위안(元)이면 모든 게 해결됐다. 그리웠던 고국산천이라며 어찌나 다녔던지, 귀국 8개월 만에 궈더제가 암으로 사망했다.

리쭝런은 별난 습관이 있었다. 평소 궈더제의 손이 거치지 않은 것은 먹지도 입지도 않았다. 궈더제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부터 주변 사람들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비위 맞추기가 보통 힘든 사람이 아니었다. 생활 습관도 까다로웠다. 총리 저우언라이가 묘안을 내놨다. “이러다 다들 골병 들겠다. 결혼시키는 게 상책이다. 신붓감을 구해라. 신랑 신분은 극비에 부쳐라.”

인구가 워낙 많다 보니 별난 남자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75세 노인과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여인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리쭝런은 30대 중반만 돼도 온갖 트집을 잡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베이징 교외의 작은 요양원에 후여우쑹(胡友宋·호우송)이라는 27세의 간호사가 있었다. 복장이나 머리 모양이 한결같다 보니 얼핏 보면 다들 비슷해 보이던 시절이지만 눈썰미 없는 사람도 한번 더 쳐다볼 정도였다. 결혼 경력이 없고 남자친구도 없었다. 성격도 좋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었다. 사진을 받아본 리쭝런은 싱글벙글했다.

후여우쑹의 요구 조건은 간단했다. “나이는 상관없다. 결혼 상대가 누구인지 그게 중요하다.” 1938년 5월, 타이얼장(台兒莊)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리쭝런을 모르는 사람은 중국 천지에 없었다. 후여우쑹이 승낙하자 신원조사가 시작됐다.

후여우쑹은 의문투성이였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고 엄마도 생모가 아니었다. 호적 모친란에 적혀 있는 이름은 천하가 다 아는 전 국민당 장군의 첩이었다. 리쭝런은 후여우쑹의 사진을 본 다음부터 다른 여인들은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저우언라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총리의 호출을 받은 후여우쑹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네 친엄마가 누구냐.” “후디에가 제 생모입니다.” 저우언라이는 경악했다. 후디에(胡蝶·호접)라면 여전히 홍콩에서 활약하는 민국 시절 최고의 영화배우였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모릅니다. 엄마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알려고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짚이는 데가 있었다. 20년 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장 다이리(戴笠·대립)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이리, 이름만 들어도 모골이 송연했던 시절이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리쭝런과 후여우쑹의 결혼식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