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꾸이전, 사생활·직업·종교 거론하며 사윗감 테스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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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호 29면

쑹씨 집안의 영향으로 기독교도가 된 장제스는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간증도 했다. 대륙 철수 직전, 직접 현판을 쓴 교회에서 설교하는 장제스. [사진 김명호]

쑹메이링의 모친 니꾸이전은 장제스의 사생활, 직업, 종교문제를 우려했다. 장제스가 고향에 있는 부인과 이혼한 서류를 내밀자 “그런 건 볼 필요 없다”며 시중에 떠도는 얘기를 꺼냈다. “정부(情婦)가 여러 명 있다고 들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97>

장제스는 침착하게 거짓과 진실이 뒤범벅된 답변을 늘어놨다. “혁명에 투신한 기간이 짧지 않다 보니 정적(政敵)이 많습니다. 승리를 거듭하자 악독한 인신공격이 뒤를 이었습니다. 광명천지에 몸 하나 숨길 곳이 없을 정도로 상처를 입었습니다.”

한 차례 한숨을 내쉰 니꾸이전은 난제(難題)를 들고나왔다. “너는 난세의 군인이다. 정벌과 살육을 몰고 다녔다. 기독교와는 물과 불이다.” 장제스는 준비해둔 대답이 있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城) 함락을 예로 들었다. “혁명의 목표는 통일입니다. 저는 통일전쟁에 몸을 던졌습니다. 통일전쟁은 성전(聖戰)입니다.” 핑계와 명분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고개를 숙이고 듣던 니꾸이전이 장제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성경을 읽어 본적이 있는가.” “워낙 바쁘다 보니 잠시 뒤적거렸을 뿐, 제대로 읽을 틈은 없었습니다.” 장제스를 바라보는 니꾸이전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기독교를 신봉했다. 내 딸과 결혼을 원한다면,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니꾸이전의 마지막 질문에 장제스는 정색을 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매일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교리를 이해할 시간을 갖겠습니다. 제가 당장 내일부터 교회를 나가겠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의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니꾸이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옆에 있던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성경이 한 권 들어있었다.

니꾸이전이 떨리는 손으로 성경을 건네자 장제스는 황급하게 일어났다. “남편은 혁명가였지만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임종 때 이 성경을 막내사위에게 주라는 말을 남겼다.” 장제스는 빈 말이라도 한번 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3년 후 정식으로 세례를 받았다.

성경을 보물처럼 껴안고 방문을 나선 장제스는 흥분했다. 차(茶)를 들고 온 여관 주인에게 “드디어 성공했다”며 휘호 다섯 점을 기념으로 남겼다. 여관 주인은 며칠이 지나서야 장제스가 누구인지를 알고 경악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장제스를 야인(野人)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중국 천지에 아무도 없었다. 하야는 했지만, 누가 뭐래도 양쯔강 이남은 장제스의 천하였다. 정계복귀는 시간문제였다.

결혼식을 복귀일로 정한 장제스는 쑹메이링에게 보내는 편지를 만천하에 공개했다. 1927년 10월 19일, 톈진에서 발행하는 익세보(益世報)에 희한한 광고가 실렸다. “지금의 나는 정치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평생 우러러 볼 사람 생각하느라 그럴 겨를도 없다. 예전에 뜻을 밝힌 적이 있지만 요령이 부족했고 정치적인 문제가 복잡할 때였다. 산야(山野) 오가며 지난날 생각하니, 전장에서 만군을 질타하며 도취했던 나날들이 한편의 허망한 꿈이었다.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은 한 사람밖에 없다. 하야한 일개 무인(武人)을 어떻게 생각할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전 세계의 언론들이 장제스가 칩거 중인 시골마을을 주시했다.

11월 26일, 장제스는 상하이의 모든 신문에 자신 명의로 광고를 했다. “그간 혁명에 분주했다. 말 위에서 세월을 보내다 보니 가정을 제대로 꾸린 적이 없다. 12월 1일, 상하이에서 쑹 여사와 결혼한다.” 1922년 겨울, 상하이의 쑹즈원 집에서 쑹메이링을 처음 본 지 5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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