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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가 싫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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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티핑 포인트』 등의 저서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맬컴 글래드웰은 2년 전 흥미로운 글 한 편을 잡지 ‘뉴요커’에 발표했다. ‘혁명은 왜 트윗되지 않을까’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21세기의 이른바 트위터 혁명을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과 대비시킨다. 필자는 후자가 강력한 연대에 바탕을 뒀던 반면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느슨한 연대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익명의 선의를 집결하는 활동이라면 몰라도,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사회적 혁명은 SNS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흔히 ‘아랍의 봄’ 같은 혁명에 SNS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과 상반된 시각이다.

 이 글을 처음 접한 건 어느 대학 강의실에 청강하러 갔을 때였다. 담당 교수는 굳이 양자택일을 하자면 글래드웰의 반대편에 설 사람이었는데, 학생들의 필독 자료로 이 글을 제시했다. A4 용지로 9쪽 분량의 짧지 않은 글이다.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흑인민권운동의 일화와 배경은 물론 자신이 반대하는 주장 역시 풍부하게 소개했다. SNS의 사회적 영향을 토론하는 데도, 그와 다른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기에 충분했다.

 SNS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정보의 유통 속도와 확산 방식을 몰라보게 바꿔놓은 건 분명하다.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도 그랬다. 안철수 후보가 사퇴를 발표한 직후 문재인 후보의 반응은 그의 트위터에서 가장 먼저 확인됐다. 하지만 SNS의 짧은 글이 수시로 촉발하는 논란의 양상은 이번에도 씁쓸했다. 안철수 후보 사퇴 직후 한 연예인은 트위터에 ‘종북’이라는 단어를 섞은 반응을 올렸다 도마에 올랐다. 두둔할 생각도, 나무랄 생각도 없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여느 사람들처럼 TV에서 보여준 연예활동이 전부다. 그런데도 집중포화 같은 반응이 빚어지는 건 역시나 놀라운 현상이다. 트친(트위터 친구)이나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아니라 실제 친구 사이, 친구가 아니라도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는 자리였다면 같은 경우라도 다른 방식으로 대화가 이어졌으리라고 본다.

 얼마 전 아는 이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가 이내 후회했다. 아주 소중한 그 무엇을 잃고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을 담담하게 표현한 글이었다. 읽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뭐라도 공감을 표하고 싶었다. 그래서 행동에 옮긴 일이라고는 습관처럼 글 하단의 ‘좋아요’를 누른 것뿐이다. 그때의 심경은 결코 좋지 않았다. ‘나도 슬퍼요’ ‘마음이 아파요’라고 댓글까지 적기가 무안했고, 다시 ‘좋아요 취소’를 누르기도 민망했을 따름이다.

 SNS는 광장에서 확성기를 잡지 않고도, 매스미디어에 등장하지 않고도 의견을 전파하는 길을 넓혔다. 하지만 여전히 광장에서 풀어야 하는 일이, 140자의 단문을 쓰고 올리는 것보다 긴 시간을 들여야 할 일이 더 많은 게 인간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