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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정 공약이면 어떠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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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일러스트=강일구]
김종수
논설위원

무소속 안철수 전 후보가 자진 사퇴함에 따라 혼미했던 대선 판이 박근혜·문재인 양자 대결로 깔끔하게 정리된 듯하다. 이제 단일화니, 3자 대결이니 하는 복잡한 대선구도가 사라지고 박·문 두 유력후보가 본격적인 정책 대결로 진검 승부를 펼칠 자리가 마련된 셈이다. 앞으로 선거관리위원회는 각 후보의 정책약속을 담은 공약집을 각 가정에 배달할 것이고, 후보들은 TV 토론에 나와 자신의 공약을 열띤 목소리로 설파할 것이다. 유권자들은 두 후보가 제시하는 공약을 잘 비교해 보고 마음을 정하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정책선거가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쉽지만 이번에도 대통령선거가 선명한 정책대결이 되기는 어려울 듯싶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각 후보의 공약이 국민이 원하는 것을 콕 찍어내질 못하고 변죽만 울릴 가능성이 크다. 현재 우리나라가 직면한 최대의 현안은 저성장 극복과 양극화 해소다. 그 해법은 성장을 통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다. 유권자들이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것 또한 그것이다. 그러나 두 후보 모두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침체 속에 우리나라만 성장하게 하고, 좋은 일자리를 쑥쑥 늘릴 묘책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에 내놓지 않았을 리 없다.

 당장 성장과 일자리 창출이 어렵다면 장래에 그 길을 열 수 있는 비전이라도 제시했으면 좋으련만 그런 희망조차 보이질 않으니 답답하다. 후보들이 확실한 미래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데는 다 사정이 있다. 저성장과 양극화를 극복할 처방이 당장 선거판에선 인기가 없거나 외면당할 ‘쓴 약’이기 때문이다. 사실 작금의 경제상황은 1997년 외환위기만큼 극적인 추락이 아니어서 실감하기 어려울 뿐 그에 못지않은 위기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올해와 내년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각각 2.2%와 3.0%로 낮췄다. 그러나 국내외 민간예측기관들은 내년에 한국의 성장률이 2%대에 그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일시적인 경기침체가 아니라 저성장 기조가 굳어질 것이란 판단이다. 지금부터 성장률의 하강세를 돌려놓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한국 경제는 재기할 동력을 상실하게 될 우려가 크다. 그러면 선진국으로의 도약은커녕 2류 국가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들에게 기대할 미래는 없어진다. 그래서 지금이 외환위기 못지않은 위기라는 것이다.

 저성장과 양극화를 넘어서려면 규제 완화를 통한 내수 확대와 비생산적인 부문의 구조조정이 관건이다. 두 가지 모두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구조조정 대상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당분간 국민 각자의 고통과 희생이 필요한 일이다. 이런 ‘쓴 약’을 공약으로 내세우면 선거에서 패할 게 뻔하다. 입에 살살 녹을 듯한 ‘사탕발림’ 공약을 내놔도 시원찮을 대선 판에 ‘쓴 약’처방을 내놓을 강심장을 가진 후보는 없다. 또 그런 ‘쓴 약’ 처방을 하려 해도 일단 당선이 돼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나라에 이롭고 국민에게 유익한 ‘쓴 약’보다는 당장 솔깃한 ‘사탕발림’ 공약에 기우는 것이다.

 ‘쓴 약’ 처방을 들고 대통령에 당선된 경우가 있다. 외환위기 때 ‘국가적인 구조조정과 고통분담’을 호소했던 김대중(DJ) 대통령이다. 그러나 DJ의 호소가 통했던 것은 너무나 다급했던 위기의 한복판에서 대선이 치러졌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저강도(低强度) 위기상황에선 먹히기 어려운 공약이다.

 그렇다면 나라에도 이롭고 선거에서도 통할 수 있는 공약은 없을까. 그래서 ‘당의정(糖衣錠)’ 공약을 생각해봤다. 당의정이란 쓴 약의 표면에 단물 옷을 입혀 먹기 좋게 만든 알약을 말한다. 당의정 공약이란 나라의 장래에 유익하지만 당장 유권자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정책에 유권자들이 호감을 가질 수 있는 표현으로 포장을 하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쓴 약’ 공약을 ‘사탕발림’으로 살짝 덮어 유권자에게 내놓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편법이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통하기만 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본다. 예를 들면, 규제 완화로 잃어버릴 기득권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자제하면서 거기서 생길 새로운 일자리와 내수 확대의 효과는 최대한 부풀려 제시하는 식이다. 물론 이런 식의 ‘당의정 공약’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후보와 정당이 현 상황의 위중함을 충분히 깨닫고 그 해법을 진지하게 고민해서 나온 결론이어야 한다.

 당의정 공약은 겉은 ‘사탕발림’처럼 보이되 속은 분명한 실천의지를 담은 ‘쓴 약’으로 채워야 한다. 실천할 수 없거나 실행해서는 안 되는 포퓰리즘적인 ‘사탕발림’ 공약과는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물론 밝은 눈을 가진 유권자라면 이런 편법을 능히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겉에 발린 ‘사탕’보다 안에 든 ‘쓴 약’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리하여 어느 후보의 공약이 진정으로 국익에 보탬이 될지를 따져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바란다. 유권자의 혜안에 나라의 장래가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