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는 이스라엘 이겼지만 전쟁은 하마스가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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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교전 8일 만인 21일(현지시간) 휴전에 전격 합의했다. 지상전 등 극단적 상황으로 치닫지 않고 ‘중동의 화약고’가 일단 안정을 되찾은 것은 이집트의 중재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외교적 노력 등 국제사회의 신속한 개입이 이뤄낸 성과로 평가된다. 이번 사태는 특히 주요국의 잇따른 리더십 전환을 전후로 일어난 국제정치적 사건이어서 각국 정상들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난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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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마스=이번 교전으로 팔레스타인에서는 160여 명, 이스라엘에서는 5명이 희생됐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이스라엘이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하마스가 승리했다”고 평했다. 특히 정적이던 파타당이 통치하던 요르단강 서안에서도 하마스 지도자 칼레드 마샬의 위상이 올라갔다. 그는 하마스 내 강경파들을 설득해 휴전 합의를 이끌어내고, 열망하던 가자지구 봉쇄 해제까지 얻어내면서 리더십을 톡톡히 발휘했다는 평가다.

 ◆이스라엘=지상군 투입 등 엄포를 놓으며 상황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갔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국제사회의 싸늘한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년 1월 조기 총선을 앞두고 그의 강경 드라이브는 보수 지지층이 결집하는 효과를 낳았다. 지지율도 20%포인트 올랐다. 결과적으로 국내 정치에서 큰 점수를 얻었다. 특히 이번 휴전협정을 이용해 가자지구 무기 밀거래를 막는 데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미국과 이집트로부터 받아낸 것도 큰 성과다.

 ◆이집트=휴전협정을 이끌어낸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을 두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무슬림형제단 소속 정치인이 아닌 이집트의 대통령으로서 사태를 해결했다”고 평가했다. 형제나 다름없는 하마스와 국가 재건을 위해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사이에서 현명하게 처신한 그의 국제정치력은 만점 수준이었다. 협상 막판에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 무기 밀수 문제를 계속 걸고 넘어지자, 즉각 리비아에서 탄두 100여 개를 싣고 넘어오는 밀수 트럭을 기습하는 ‘쇼맨십’으로 보너스 점수까지 얻었다.

21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교전 8일 만에 휴전에 합의하자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이 기뻐하고 있다. [가자 AP=연합뉴스]

 ◆미국=AFP통신은 이번 사태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 2기 행정부의 중동평화 정책에 탄탄대로를 깔아줬으며, 아랍의 봄 이후 정치지형이 뒤바뀐 아랍권에서 미국이 적극적인 외교행보를 펼치겠다는 의지도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협상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이스라엘-요르단강 서안-이집트 등을 분주히 오가며 셔틀외교를 벌인 지 20시간 만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뉴욕타임스는 이 일로 주도권이 네타냐후에서 오바마로 넘어갔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사실 휴전협정은 20일 성사될 수도 있었지만, 클린턴이 급파되자 미국이 얼마나 이스라엘의 입장을 대변하며 노력하는지 확인하려고 네타냐후가 일부러 뒤로 빠진 것”이라고 보도했다.

◆러시아=시리아 내전을 비롯한 아랍권 이슈에는 철저히 반서구적 입장을 지켜오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크렘린궁은 사태 발생 직후 양쪽에 모두 자제를 촉구했다. 로이터는 “푸틴은 그동안 소련에서 이어지던 아랍국가들과의 친분과 새로운 전략국가로 떠오른 이스라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균형적 입장을 취해 아랍권 언론으로부터 양심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체제가 사실상 처음으로 맞닥뜨린 국제 현안에서 중국은 “아랍 국가들의 휴전 노력을 지지한다”며 밥상에 숟가락을 얹었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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