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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예술과 과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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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최우람, 쿠스토스 카붐(Custos Cavum), 2011, 금속·레진·모터·기어 등, 220×360×260㎝. [사진 갤러리현대]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아주 오래전 두 개의 세계가 있었다. 두 세계는 작은 구멍들로 서로 연결돼 있었고, 마치 숨쉬듯 서로 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구멍들은 자꾸 닫히려는 성질이 있어 각각의 구멍 옆에는 늘 구멍을 지키는 수호자가 하나씩 있었다. 쿠스토스 카붐(Custos Cavum)이라 불리던 이 수호자는 바다사자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늘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커다란 앞니로 구멍을 갉았다.”

 전시장 지하엔 길이 3.6m의 이 금속 생물체가 도사리고 있었다. 컴퓨터로 제어되는 모터를 달고 숨쉬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괴생물체의 이름은 쿠스토스 카붐. 라틴어로 ‘숨구멍의 수호자’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최우람(42)씨다. 자신의 이름을 딴 기계생명체연합연구소(URAM: United Research of Anima Machine)를 이끌고 있다. 키네틱 아티스트(kinetic artist), 즉 움직이는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인 최씨는 서울 연희동 작업실에서 조각가·프로그래머 등 7명의 스태프와 함께 7개월 걸려 이 괴물을 만들었다.

 1970년생, ‘마징가Z’에 열광하며 자랐다. 다만 그의 영웅은 이 로봇을 조종하던 ‘쇠돌이’가 아니라 ‘김 박사’. 과학자가 아이들의 로망이었고, 제어계측공학과가 법대보다 가기 어려웠던 때의 일이다. 미대 조소과에 진학한 뒤 잊었던 로봇 세계로 돌아온 것은 28세, 첫 개인전을 준비할 때였다. 동급생들보다 늦었다는 생각에 조바심치던 그때, 거리의 자동차들이 야생의 물소떼처럼 보였다. 개발이 한창이던 대치동 집 창밖에선 매일매일 건물이 쑥쑥 자라났다. ‘우리는 기계의 정글 속에 살고 있구나’ 싶었다.

 기술자들과 함께 기계 생명체를 만들고, 라틴어 학명을 붙이고, 탄생 설화를 가미해 종교를 흉내 냈다. 생명과 인간의 본질, 역사 이전의 세계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예술가가 과학을 빌려 창조한 세계다. 가장 큰 고민은 피조물들의 수명을 늘리는 일. “화성 착륙선을 만드는 회사의 모터를 구했다”며 좋아하는 그는 과학자를 닮았다.

 예술과 과학, 정반대인 듯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공통점이라면 당장의 밥이 나오지도 않는 ‘쓸데없는 짓’에 골몰한다는 점일 듯. 그래서 매력적이다. 일상 너머를 통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최씨는 묻는다. “2000년 혼다의 아시모(ASIMO)가 나왔어요. 인간처럼 걷고 물체를 인식한 최초의 인공지능 로봇이죠. 인간이 걷기 시작한 건 5만 년도 더 전의 일입니다. 기계는 그 오랜 세월 축적한 것들을 빠른 속도로 이어받아 발전 중이죠. 그런데 우리는 더 행복해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