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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 女論

낙태를 원하는 여성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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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한국에서 처음으로 출산율을 낮추는 문제를 논의한 것은 1930년대 초반이다. 다산(多産)이 곧 풍요를 의미했던 전통적인 관념은 경제적인 빈곤 완화, 우생학적 필요, 모성의 보호 등을 위해서는 산아제한(産兒制限)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해 여러 지식인들이 논쟁을 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정종명(鄭鍾鳴)도 끼어 있었다.

 정종명은 1920년대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주축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조선여자고학생 상조회를 조직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여성동우회를 운영하기도 했고 근우회(槿友會)의 의장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세브란스병원 간호부학교를 나온 간호사이자 안국동에서 조산원을 운영한 산파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의 직업은 운동자금을 마련하고 동지들을 보살피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산파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임신, 출산, 낙태, 사산 등과 관련된 현실을 직접 많이 목격한 정종명은 조선의 어려운 사회 상황에 비춰볼 때 산아제한 논의가 다소 늦게 대두되었음을 지적했다. 특히 그녀는 낙태를 허용하는 “법률상 고려가 선결”되어야 함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직업적인 예리한 감각을 보여주었다(‘산아제한의 절규’, 『삼천리』, 1930. 4). 즉 정종명은 조산사로서 낙태의 합법화가 모자 보건을 위해 일차적으로 필요한 요건임을 실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한 고3여학생이 낙태 수술을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을 계기로 낙태반대운동을 해온 단체에서는 낙태의 금지에 대한 목청을 더더욱 높였고, 여성단체들은 반대로 낙태의 합법화를 통해 낙태수술이 음성화되고 위험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낙태합법화 반대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문제가 하나 있다. ‘피임’을 하고 싶은 여성은 꽤 많겠지만, ‘낙태’를 하고 싶은 여성은 거의 없다는 사실 말이다. 한 생명체를 죽이고 자신의 몸에도 상처와 고통을 가해야 하는 낙태가 ‘좋아서’ 하는 여성이 어디 있겠는가? 당사자 자신만큼 낙태 수술 받는 것이 싫고 무서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선택이 낙태다.

 따라서 낙태를 합법화하면 낙태 수술이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은 원인 오판이다. 낙태 수술이 늘어나게 만드는 진짜 원인은 잘못된 성교육, 피임의 실패, 출산·양육이 불가능한 사회 현실 등에 있는 것이지 낙태의 합법화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