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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해상봉쇄 ‘클라크 라인’ 그은 유엔군 총사령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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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호 28면

오랜 세월 전세계를 유랑하던 디아스포라(이산) 유대인들은 직업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토지는 물론 대단위 농업·공업 생산시설 소유가 금지됐다. 국가 공직 진출도 용이하지 않았다. 개종을 한다 해도 하위직에 머물렀다. 그래서 이들은 행상, 돈놀이, 귀금속 세공 등의 제한된 직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동·서부 유럽 국가에 살던 아시케나지들은 사정이 열악했다. 한정된 유대인 거주구역인 ‘게토’(동유럽선 ‘슈테틀’이라고 부름)에 모여 집단생활을 하면서 기독교 사회의 하층계급으로 전락했다. 반면 이슬람 국가에 정착한 세파라디는 대부분 거주국에 잘 동화했다. 지금은 이스라엘과 아랍권이 사이가 나쁘지만 이스라엘 건국 전 이슬람 국가에 살던 세파라디들은 커다란 위협 없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삶을 누렸다. 그래도 공직 진출은 어려웠고 특히 군부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유대인 출신 첫 대장, 마크 클라크

중세기 이후 유럽 각국의 군부는 엘리트층이 장악했다. 하층민 유대인에겐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았다. 군 장교나 고위 지휘관에겐 국가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이 요구됐다. 선민(選民)을 자처하며 거주국에서의 동화를 거부하고 유대교 전통, 문화를 고수해온 유대인들은 항상 불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대인은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동안 국가의 기본 요소인 영토와 국가를 수호해야 할 무력체계를 갖지 못했다.

2차 대전 소재 영화 ‘안지오’ 실제 주인공
러시아 공산혁명 당시 ‘붉은 군대’ 지휘부에 유대인이 다수 있었지만 훗날 스탈린의 숙청으로 유대인 고위 지휘관은 자취를 감췄다. 미국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때 일부 유대인 하급장교의 참전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군인이 고위 지휘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제1차 세계대전 이후다. 이것도 몇 명 되지 않았다. 1938∼40년간 함대사령관을 지낸 클로드 블록 해군제독 그리고 핵잠수함 개발 책임자였던 하이먼 리커버 제독 정도다. 그런데 유대인으로 군부 고위 지휘관을 지낸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마크 클라크(사진) 장군이다.

클라크는 1896년 뉴욕주 사케츠 하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루마니아계 유대인이었으므로 클라크는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다. 그는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미국 성공회로 개종했다.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임관했다. 전시라 승진이 빨라 곧 대위가 돼 프랑스 전선에 중대장으로 투입됐다. 이때 폭발물 파편이 튀어 중상을 입고 한동안 치료를 받았다. 이후 야전군이 아닌 내근 부서에 근무했다. 소령 때 국방차관보 보좌관을 지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준장, 소장으로 진급해 영국 주둔 미군 2군단장, 북아프리카 ‘횃불 작전’(알제리 상륙작전) 지휘관으로 무공을 세웠다. 42년 말 미국 역사상 최연소 육군중장으로 승진해 연합군 부사령관 겸 이탈리아전선 사령관에 임명됐다. 44년 6월 그의 작전지휘하에 로마가 해방됐다. 미국 영화감독 에드워드 드미트릭은 68년 ‘안지오’라는 전쟁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클라크 장군 지휘하의 미군이 이탈리아에서 벌인 군사작전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원로배우 로버트 라이언이 클라크 역을 맡았다.

44년 이탈리아 주둔 독일 제10군의 퇴각을 방조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클라크는 45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가 준장에서 대장까지 고속 승진한 배경엔 조지 마셜 원수(훗날 국무장관)와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훗날 대통령)의 각별한 후원이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종전 후 클라크는 오스트리아 점령 미군 사령관 겸 고등판무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본국으로 복귀해 샌프란시스코 프리시디오 제6군 사령관을 지냈다. 한국전이 한창이던 52년 5월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 매슈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제3대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아들 빌 클라크 대위도 한국전에 중대장으로 참전해 부상을 입었다. 클라크는 52년 7월 7일자 타임지 표지 인물로 수록됐다.

클라크는 53년 한국전 휴전협정에 유엔군을 대표해 서명했다. 그는 미국이 수행한 전쟁 중 승리 없는 휴전협정에 최초로 서명한 장성이 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54년 전역한 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 위치한 국방대학 시터델(Citadel)의 총장, 명예총장으로 재직했다. 미국 유대인 출신 군인으론 최초로 대장까지 승진하는 기록을 남긴 클라크는 84년 87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그의 사후 찰스턴 교외 고속도로 구간이 ‘마크 클라크’ 고속도로로 명명됐다.

반공주의자였지만 이승만과 갈등
클라크는 한국전 유엔군 총사령관 시절 그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다. 중공군 참전에 따른 한국전 전면 확전과 미국 젊은이들의 희생을 우려한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조기 휴전을 그에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클라크 자신은 투철한 반공주의자였지만 본국 훈령과 한국 이승만 대통령의 정전 반대 입장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이 대통령은 한국군 단독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한편 유엔군 측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해 클라크와 미국 정부를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54년 저술한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란 자신의 저서에 일부 남겼다.

이산 유대인으론 군 최고위직에 올랐던 클라크 장군은 한국전 종전 과정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군 기본편제 구축에 기여했으며 해상 봉쇄선인 ‘클라크 라인’(지금의 NLL)을 선포했다. 그런데 그가 종전협정에 서명한 지 60년이 다 된 현시점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긴장과 대결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분단지역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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