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교육전쟁, 아빠가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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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선희
논설위원

‘아빠의 무관심’이 자녀 교육 성공 3대 조건 중 하나였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 대입전쟁은 이를 흘러간 이야기로 만들었다. 지난 주말, ‘명문 사설교육기관’이 개최한 올 대학수학능력시험 입시전략 설명회엔 참석자들 중 아빠 비중이 척 보아도 30~40% 정도 됐다. 아빠의 참여는 최근 들어 꾸준히 늘어왔다. 입시설명회보다 재수학원 학부모 설명회엔 아빠들이 더 많다.

 과거 수험생끼리 진검승부 한판으로 대학을 결정했던 본고사와 학력고사 시대에 아빠는 술 먹고 늦게 와도 조용히 까치발로 들어와 자녀의 수면과 엄마의 백일기도를 방해하지 않으면 됐다. 수능 도입 후 엄마들의 정보전이 불붙었을 때는 간섭만 하지 않으면 됐다. 그러나 학원 선정과 스펙 만들기에 치중했던 엄마들의 정보전과 분투는 한계에 부닥쳤다. 대학마다 수시와 정시의 각각 다른 수천 가지 전형 앞에서 자녀의 스펙과 점수에 유리한 조합을 찾아내고 분석하는 일은 대단한 지구력과 집중력, 분석력을 요하는 일이다. 이 부분에서 아빠가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지난해 정시로 아들이 대입에 성공했던 한 아빠는 당시 휴가를 내고 사흘 밤낮을 눈이 충혈될 정도로 인터넷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돌려 수백 가지 조합을 만든 뒤 모 대학에 과감하게 상향 지원했다. 그 결과 안정권이라고 믿었던 대학에선 떨어지고, 상향 지원했던 대학에 추가 합격하는 기쁨을 맛봤다고 했다. 그는 “결혼 후 20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로부터 마음 깊이에서 우러나는 찬사와 환호를 받았다”며 흐뭇해했다.

 수시에서 요구하는 ‘자기소개서(자소서)’ 작성에도 아빠의 역할이 늘고 있단다. 사설 학원의 ‘엄마 자소서반’을 수료한 엄마들이 자녀 자소서를 함께 쓰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 입학사정관들이 이런 자소서를 귀신같이 잡아내면서 학원가에선 ‘아빠와 함께 쓰라’는 노하우를 전수한단다. 입학사정관이 주로 아빠 나이대의 남성들이 많기 때문에 훨씬 호소력이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아빠들이 자소서 ‘열공’을 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렇다 보니 요즘 대입은 ‘실력’이 아니라 ‘전략’, 대입 실패는 ‘전략의 실패’라는 말이 나온다. 이에 입시 전략 수행에서 아빠의 활약이 기대되는 자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또 요즘 교육 현장의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이 정도는 ‘낭만적’이라는 말이 조만간 나올 듯하다. 최근 서울시 교육감 재선거에 보수 단일후보로 출마한다는 문용린 예비후보가 “중1은 중간·기말고사를 보지 않고, 진로 탐색 기간으로 주겠다”고 밝혔다. 이에 가장 긴장하는 건 교육에 관심 많은 ‘민감한’ 아빠들이다. 진로 탐색은 아빠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한 아빠는 “요즘처럼 빨리 변하는 시대에 십수 년 앞을 내다보는 아이의 진로 탐색을 어떻게 할지 걱정”이라며 “이런 교육제도가 도입되면 대입에서 분명 진로 탐색 스펙을 요구할 텐데 결국 이건 아빠가 해야 할 몫 아니겠느냐”고 걱정했다.

 “중1, 2학년은 원래 진로 탐색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고, 지력(知力)을 키워야 하는 때” “설마 교육학자인 그분이 한 말이 맞느냐” “7차 교육과정부터 교육이 망가지기 시작하더니 이젠 공교육을 완전히 접을 모양”. 이 발언을 놓고 통화했던 교육학자와 교육관계자들의 하나 같은 반응이다.

 이뿐 아니라도 대선 후보와 교육감 후보들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반교육적 공약’을 질러대고, 공교육은 점점 기대난망으로 치닫는다. 이에 ‘아이를 좋은 학원에 보내는 게 가장 좋은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교육학자도 있다. 『오바마도 몰랐던 한국 교육의 비밀-아빠는 죽어도 학원은 죽지 않는다』를 쓴 김영천 진주교육대학교 교수다. 그는 “작금의 한국 교육을 버텨주는 건 학교가 아니라 학원”이라며 “이 시대 아빠가 할 일은 자녀의 강점·약점과 학원마다의 교육법을 분석해 소문난 학원이 아니라 자녀에게 적합한 학원을 찾아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아빠들까지 교육전선에 뛰어들어 혼전을 벌이는 시대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