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직원들은 그녀를 “형님”이라 부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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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LG이노텍 광주공장 여성 반장 3인방이 엄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영희?노현미·박윤애씨. 이들은 LG이노텍 여성 현장 반장 1, 2, 3호다. [사진 LG이노텍]

1980년대 후반, 집안 형편이 좋지 않거나 동생들 학비가 필요한 전국 각지의 고졸 ‘언니’들에게 공장은 선택보단 주어진 운명에 가까웠다. 조장부터 공장장까지 여성은 없었기에 이들은 약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고졸 생산직 직원으로 입사해 생산직 중 가장 고위직인 ‘현장반장’이 된 언니들이 있다. 이 언니들은 현장에서 남자 직원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하고, 임원 앞에서 공정 개선 계획을 직접 발표한다. 전자부품업체인 LG이노텍 광주공장 김영희(43·디스플레이 네트워크제조팀), 노현미(41·광학솔루션 제조기술팀), 박윤애(41·발광다이오드 제조팀) 반장이 그들이다.

 이들은 LG그룹 전자계열사 공장 전체를 통틀어 여성 현장반장 1·2·3호다. 반장은 현장 생산직 근로자 50~80여 명을 통솔하는 자리다. 현재 LG이노텍 광주공장은 반장 25명 중 11명이 여성이다. 여성 반장이 존재하는 곳은 LG이노텍 광주공장이 유일하다. LG이노텍 관계자는 “광주 공장 여성 근로자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례적인 여성 반장 비율을 설명할 수 없다”며 “전설의 여성 반장 3인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설명했다.

 여성 반장 1호인 김영희씨는 광주 공장이 생긴 이듬해인 1986년 12월 입사했다. 당시 같이 입사한 150여 명의 여성 동기 중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은 김 반장 한 명뿐이다. 김 반장은 자신이 여성 1호 반장이 된 것에 대해 “여자라 안 된다는 말이 듣기 싫어 악착같이 덤볐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는 “여자 반장은 나 하나뿐이라 내가 지각하거나 실수하는 건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며 “체육대회는 물론 점심시간에 남자 직원들끼리 하는 족구·배구에도 빠지지 않고 선수로 뛰었다”고 말했다. 김 반장은 “현장 공정 관리를 하다 보면 개발팀 같은 다른 부서와 충돌할 경우가 있는데 이때 기싸움에서 지면 안 된다”며 “남자 반장이 큰소리치면 금방 대응하던 관계 직원들이 여자 반장은 무시하는데 이때 지지 말고 ‘형님’으로 불릴 만큼 대응해야 현장 통제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2호인 노현미 반장은 고민 상담 해결사 역할을 자청했다. 특히 가족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하는 직원들과 얘기를 많이 나눈다. 그 자신, 8년간 체험한 기숙사 생활을 바탕으로 해서다. 노 반장은 “내가 취직하지 않으면 동생들이 학교를 못 다니는 상황이었지만 대학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며 “그만둔다는 직원들이 나를 찾아오면 그때 얘기를 많이 해 준다”고 말했다. 아쉬움도 있다. 노 반장은 “여러 가지 조언을 하지만 확실히 예전보다 추석·명절이 지나면 대학 간 친구들을 만난 뒤 퇴사하는 직원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 반장에 대해 “여성 반장은 공정 미세 과정을 관찰하는 꼼꼼함이 장점”이라며 “외부 술자리 대신 현장을 지키는 사람도 여성 반장”이라고 말했다.

 박윤애 반장은 통솔하는 직원 53명이 모두 남성이다. 박 반장은 “직원들이 발광다이오드 제조 분야는 나보다 전문가일 수 있기 때문에 반장 부임 2주 전부터 LED 기술 관련 자료 수집을 하는 동시에 제조현장에서 실무를 익히는 인턴 같은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정확한 공정을 알고 있어야 긴급 상황에 대처능력이 생긴다는 이유에서였다. 박 반장은 “남자 직원들은 여자 직원과 달리 그날 해야 할 일에 대해 마감시간과 공정 과정, 양까지 명확하게 규칙적으로 제시해 주는 걸 좋아한다”며 “구체적인 업무 지시를 마음 상해하거나 감정적으로 받아들여 조심해야 하는 여성 직원들과는 다른 점”이라고 덧붙였다.

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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