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살리기 급하다] 2. 기업의욕을 살려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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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이 일할 수 있게 내버려 두라. "

대표적 전문경영인인 손길승(孫吉丞)SK 회장이 최근 경영자 세미나에서 한 이 말은 기업인들의 답답한 심정을 대변한다.

말단사원 시절 경리부서에 처음 배치되던 날 밤을 꼬박 새면서 회계원리 교과서를 달콤한 소설책처럼 독파했다는 그의 술회처럼, 예전의 기업인들에겐 '신바람' 이 있었다. 하지만 기업하기 힘든 나라로 낙인 찍힌 오늘의 한국 기업들은 피로 기색이 역력하다.

◇ 유형.무형의 굴레가 너무 많다=기업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비단 법적 규제만은 아니다. 최근 감원문제가 언론에 보도된 한 대기업엔 바로 다음날 유력 정부기관들로부터 진위를 파악하려는 전화 문의가 줄을 이었다.

"실업.노사문제가 미묘한 시점에 국민 불안요인이 되지 않겠느냐" 는 불편한 심기도 아울러 전달됐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이것 저것 눈치볼 데가 많다. 정치권.정부 분위기를 잘 살피고 요령껏 피하는 것이 일상업무가 됐다.

적잖은 국민과 식자층.시민단체들도 잘한 것 보다는 못한 것을 들춰내는데 익숙하다. 회사를 애써 키워 30대 그룹에 들게 된 것이 명예가 아니라 멍에가 된지 오래다.

한경동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역차별 시비가 일 정도로 외국기업들이 우리 안방시장을 누비는 마당에 과거 국내기업간 경쟁에 초점을 맞춘 공정거래 규제 틀도 바뀌어야 한다" 고 말했다.

아시아 20위 규모까지가 일본기업이고 삼성전자는 24위인데 삼성전자가 각종 대기업 규제에 묶여 있는 사이에 일본기업들은 국내에 들어와 훨훨 날고 있다는 것.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1만건이 넘는 규제를 완화했다. 하지만 핵심 규제들은 멀쩡히 살아 있다. 그래서 해외에서도 한국은 기업하기 힘든 나라로 소문났다.

미국 포브스지가 최근 주요 25개국에 대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 순서를 매겼더니 한국은 경쟁국 대만은 물론 말레이시아.중국보다 못한 하위권(18위)이었다. 이러는 사이 기업할 맛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한때 'Y이론' 이란 이름과 함께 한국경제의 성공비결로 지목된 '신바람' 은 찾아보기 힘들다.

◇ 한두 가지가 아니라 확 바꿔야 한다=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조건' 보고서에서 ▶규제완화 이외에도 ▶투입 요소(인력.자금 등)▶산업 인프라(공장용지.물류 등)▶사회통합(노사관계.국민지지 등)을 주요 변수로 꼽았다.

우선 기업이 필요로 하는 사람.돈.땅을 구할 수 있는 여건을 정비해야 한다. 이러한 '생산요소' 를 체계적으로 공급하는 밑그림을 그리는 곳은 산업자원부.재정경제부.교육인적자원부.정보통신부.과학기술부 등인데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산업연구원의 송병준 지식산업연구실장은 "생산요소의 원활한 공급을 맡은 관련 부처들이 수요자인 기업의 입장에 서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고 조언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엄기웅 상무는 "이제 R&D란 말을 쪼개서 국책연구소나 대학은 초기투자가 많으면서 실패 위험이 큰 기초.첨단기술의 연구(R)를 맡고, 이를 당장 써먹어야 할 기업은 현장에서 개발(D)에 주력하는 역할 분담이 이뤄질 때" 라고 말했다.

인프라 확충도 시급하다. 사회간접자본(SOC)의 미비로 우리나라의 물류비는 1998년 현재 국내 총생산의 17%인 74조여원에 달한다. 미국은 10%선이다. 독특한 노사관행과 잦은 노사분규는 외국기업들이 한국에서 사업하기 어려운 점으로 꼽힌다.

◇ 기업을 믿어야 한다=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많은 기업들은 선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SK텔레콤 등 20여개 상장사는 올 상반기 사상 최고의 실적을 냈다.

이정조 향영21세기리스크컨설팅 사장은 "금리가 떨어진 것 만으로도 우량기업들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며 "여건만 받쳐주면 외국기업들과 겨뤄볼 만하다는 증거" 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그 출발을 '기업의욕 고취' 에 둬야 한다고 지적한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경기침체의 돌파구는 능력 있고, 의지도 있는 간판.유력기업이 새로운 사업에 과감히 뛰어들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며 "그래야 투자도 살고, 고용 창출도 되는데 경제력 집중이 늘어난다는 단기적인 부작용에 얽매여선 안된다" 고 말했다.

세계 일류국들은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지향해 시장개입을 최소화하면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다. 미국은 법인세(현행 최고세율 35%)폐지까지 검토하고 있고, 핀란드 정부는 기업정책을 세울 때 간판기업인 노키아의 경영진을 참석케 할 정도다.

규제라면 우리보다 한수 위였던 일본도 최근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총력을 다한다. 올 들어 기업들에 은행업 문호를 과감히 개방해 대표적 제조업체인 소니가 은행업에 진출하기도 했다. 박용성(朴容晟)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무엇보다 기업가들이 일할 의욕을 살려줘야 한국경제의 미래가 있다" 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시래.이세정.홍승일.김남중 기자 sr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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