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승리 확인 후 일단 몸 낮추기 경제 챙기기와 중국 견제로 2기 시작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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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집권 2기를 시작한 8일. 백악관은 하루 종일 고요했다. 전날 시카고에서 백악관으로 돌아온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공식 일정을 잡지 않았다. 항상 받아 오던 안보 관련 브리핑만 오벌 오피스에서 비공개 일정으로 소화했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도 브리핑을 생략했다. 워싱턴타임스 등 미 언론은 “대통령 가족이 키우는 강아지 ‘보’만 두 번 나타났을 뿐 대통령을 볼 순 없었다”며 “오바마 대통령 임기 중 그가 가장 눈에 띄지 않은 날”이라고 표현했다.

대통령의 거의 모든 일정을 밀착 촬영하는 전속 사진작가 피트 수자가 8일 백악관 홈페이지에 올린 유일한 사진은 오바마 대통령이 오벌 오피스에서 세계 정상들로부터 재선 축하 전화를 받는 모습이다. 그러나 사진 속 오바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재선의 기쁨을 마음껏 즐긴 전임자들과는 사뭇 다른 신중 행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한 바로 다음날인 2004년 11월 4일 각료회의 주재 후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재선 성공으로 정치적 자산을 얻었다”고 기자들 앞에서 자신감을 보였다. 빌 클린턴 대통령 역시 재선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휴가를 떠나는 여유를 보였다.

반면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 후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보인 건 다음날인 9일 오후 1시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성명을 발표할 때였다. 발표 시간도 7분으로 짧은 편에 속했다. 2기 행정부의 정책 방향을 밝힐 기자회견은 재선 성공 후 8일이나 지난 14일에 예정돼 있다. 숨 고르기를 하며 ‘재선 프리미엄’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려는 모양새다.

미 언론에선 “오바마 대통령이 재정 절벽(fiscal cliff) 사태 등 산적한 현안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일부러 몸을 낮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민주당 전략가 마크 멜먼은 “지금과 같이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몸을 낮추는 건 영리한 전략”이라고 풀이했다.

숨 고르기 속 ‘재선 프리미엄’ 노려
오바마가 뜸을 들인 뒤 발표한 9일 성명은 경제였다. 그중에서도 재정 절벽 문제 해결과 부자 증세에 초점이 맞춰졌다. 성명 발표 시간은 짧았지만 톤은 강했다. 그는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선 재정 삭감과 세금 인상을 결합해야 한다”며 “이번 대선 결과는 재정 절벽 극복에 대한 내 방식에 국민 과반이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원을 장악한 야당인 공화당을 압박했다.

지난해 여름 미국 여야는 부채한도 증액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별도의 합의가 연말까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미국은 내년 1월 1일부터 국가 재정에서 약 6000억 달러(약 650조원)가 증발하는 재정 절벽 위기에 직면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2년 부시 전 대통령이 개인 소득세율을 40%에서 35%로 낮춘 감세 조치가 올해 말 종료된다. 만약 재정 절벽 위기를 타개하지 못할 경우 경제 성장률 하락이 예상돼 국가신용 등급 강등 사태로 번질 수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피치와 무디스 모두 7일 재정 절벽을 피하지 못할 경우 내년 국가신용 등급이 강등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오바마 재선 후 뉴욕 증시는 재정절벽 우려로 2%포인트 이상 폭락했다. 오바마는 중산층 등 서민과 중소기업에 감세 조치를 1년 연장하는 대신 연소득 25만 달러(약 2억7000만원) 이상 가계에 대해선 감세 조치를 중단, 사실상 증세를 하겠다는 공약을 밝힌 바 있다.

오바마는 9일 성명에서 “나처럼 25만 달러 이상 버는 사람들은 한 푼의 세금도 더 내지 않는 상황에서 학생과 노인, 중산층 가정에 재정 적자 감축에 필요한 돈을 내라고 요구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카니 대변인 역시 브리핑에서 “공화당이 소득 최상위 계층에 대한 세금 감면을 포함한 법안을 통과시킨다면 오바마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오바마는 그러나 타협의 문은 열어뒀다. “모든 세부 사항에 매여 있는 건 아니다. 나는 타협에 열려 있으며, 새로운 아이디어에도 열려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그러면서 16일 양당 지도부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이 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협상이 장밋빛은 아니다. 공화당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오바마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한 직후 기자들과 만나 “세금을 올리는 건 모든 국민이 원하는 일자리 창출을 위한 역량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이런 계획은 하원은 물론 (민주당이 다수석을 차지한) 상원에서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베이너 의장 역시 “선택에 제한을 두고 싶지는 않다. 여러 방법이 있기 마련”이라고 타협의 문은 열어 뒀다. 16일 백악관 담판은 이래저래 주목을 받고 있다.

‘환태평양동반자협정’ 박차 가할 듯
16일 의회 지도부와의 협상 바로 다음날 오바마는 숨가쁜 해외 순방 일정을 소화한다. 백악관은 8일 “오바마 대통령이 17~20일 미얀마·태국·캄보디아를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미얀마·캄보디아는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선 최초 방문이다.

오바마는 일찌감치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을 외교 기조로 내세웠다. 외교 정책의 중심은 중동·유럽에서 아시아 지역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이번 방문은 행선지가 중국 앞마당인 데다 중국이 18차 당대회를 통해 권력교체를 이루는 시점이어서 의미가 크다. 외교가에선 “중국 견제의 의도가 있다”고 분석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17일 태국 방콕을 방문해 잉락 친나왓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미얀마 양곤으로 넘어가 테인 세인 대통령과 민주화 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치 여사를 만난다. 18일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리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참석하고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회원국 정상과도 만난다. 오바마뿐 아니라 리언 패네타 국방장관도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새뮤얼 로클리어 미 태평양군사령관 등과 함께 태국·캄보디아를 방문한다.

중국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環球時報)는 9일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순방을 “중국 포위 전략”으로 해석했다. 중국과 오랜 기간 가까운 관계를 맺어온 나라들을 방문하면서 중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위상 확대를 억제하는 복합적 목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중국은 과거 미얀마 군사 정권을 지원하며 깊숙한 관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미얀마가 최근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중국의 위상은 흔들리고 있다. 캄보디아 역시 중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제공받는 등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무역 및 통상 관련 압박도 가시화되고 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7일 중국산 태양광 패널에 대해 최고 250%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무역 분쟁에서 200%가 넘는 추가 관세가 부과된 건 최초다. 미 정부는 올해에만 중국 정부를 세 차례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 상황이다. 오바마 2기 행정부는 중국 견제를 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추진에도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한다.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중국 동방조보(東方早報)는 “오바마 대통령의 연임은 양국 간 무역전쟁의 심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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