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GA투어에 미국 선수 존재감 심어 뿌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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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호 19면

스테이시 루이스가 4일 미즈노 클래식에서 역전 우승을 한 뒤 트로피에 입 맞추고 있다. [시마 AP=연합뉴스]

“아빠 내가 또 해냈어요. 마지막 날 8타나 줄이며 역전 우승했다고요.”
지난 4일(한국시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미즈노 클래식 최종라운드가 열린 일본 미에현 시마시의 긴데쓰 가시고지마 골프장. 스테이시 루이스(27·미국)는 최종합계 11언더파로 우승을 확정 짓고 휴대전화부터 꺼냈다. 미국 텍사스에 있는 아버지 데일 루이스(55)에게 우승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대회를 치르는 3일 내내 냉정한 승부사의 얼굴로 작은 미소조차 짓지 않았던 루이스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큰 소리로 환호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루이스는 이 대회 우승이 절실했다. 올 시즌 LPGA 투어 올해의 선수상을 놓고 박인비(24)와 벌인 1, 2위 다툼이 치열해지면서였다, 이 대회 전까지 박인비는 12개 대회에서 우승 2차례, 준우승 5차례를 포함해 총 11번 톱 10에 오르면서 올해의 선수상 포인트를 156점까지 쌓았다. 루이스(184점)와의 점수 차이는 단 28점. 루이스 입장에서는 박인비의 우승 한 번이면 순위가 뒤바뀔 수도 있었던 최대 위기였다.

LPGA투어 ‘올해의 선수상’ 0순위, 스테이시 루이스

그러나 루이스는 미즈노 클래식에서 시즌 네 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박인비와의 격차를 58점으로 벌렸다. 2라운드까지 선두 이보미(24·정관장)에게 7타 뒤진 공동 8위였지만 마지막 날 한꺼번에 8타를 줄이며 대역전 드라마를 완성해 냈다. 경기 후 루이스는 미국에 있는 가족들의 응원이 마지막 날 힘을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했다. 매일 경기가 끝나면 아버지와 긴 통화를 했고 경기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루이스는 “대회 내내 가족들 생각이 많이 났다. 일본에서 경기가 끝나면 미국은 한밤중이었다. 미국에 대회가 생중계되지 않아 온 가족이 경기를 보지도 못하고 내 전화만 기다리며 기도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미즈노 대회 마지막 날 8타 줄이며 대역전
오늘날 루이스가 세계 최고의 골프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건 ‘가족의 힘’이 컸다. 특히 루이스의 할아버지 알 루이스는 손녀가 메이저 퀸이 되는 중요한 동기를 부여했다. 알 루이스가 알츠하이머로 투병하던 2010년. 할아버지는 병세가 악화되면서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손녀 루이스만은 마지막까지 잊지 않았다. 투병 생활 중에도 손녀의 경기를 챙겨보았고 몇몇 경기 영상을 녹화했다가 수없이 반복해 보기도 했다. 루이스는 “할아버지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멘털 선생님이었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곧장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았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다음날부터 샷감이 좋아졌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알 루이스는 지난해 3월 31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사랑했던 손녀 루이스가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하기 5일 전이었다. 대회 전 들려온 비보에 루이스는 충격에 휩싸였고 대회 출전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루이스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할아버지 영전에 약속했던 우승 트로피를 바치겠다며 골프화 끈을 질끈 매었다. 당시 루이스는 인터뷰에서 “할아버지가 끝까지 열심히 경기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분명 하늘에서 응원해 주신 것 같다. 경기 중 힘든 상황에 처할 때마다 ‘꼭 올해 첫 승을 거두겠어요’라고 할아버지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약속을 지킬 수 있어 정말 기쁘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버지 데일 루이스도 딸의 든든한 후원자다. 그는 루이스가 프로에 데뷔하기 전까지 딸의 캐디백을 멨다. 루이스가 주니어 선수 시절 때는 골프를 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줬다. 또 척추측만증을 앓아오던 루이스가 18세 때 티타늄 고정물과 5개의 나사를 삽입하는 대수술을 받았을 때는 딸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밤낮없이 재활 운동을 도왔다. 루이스는 “어릴 때부터 골프는 가장 재미있는 놀이였다. 주변에는 부모의 압박을 못 이겨 운동을 그만두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골프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연을 느끼면서 바람과 친해지는 방법을 가르쳐 줬고, 골프가 왜 즐거운 운동인지 스스로 깨닫게 해줬다”고 설명했다.

루이스는 미즈노 클래식을 앞두고 중압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미국과 해외 언론들이 박인비와 벌인 올해의 선수상 경쟁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루이스는 ‘나는 강하다’고 되뇌며 흔들리지 않았다. 실제로 루이스는 미즈노 클래식을 앞두고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박인비가 위협적이지 않으냐는 질문에 “인비가 잘하고 있지만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 나 역시 올 시즌 3승을 올리며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달랐다. 루이스는 우승을 확정 짓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매서운 상승세를 탔던 인비가 위협적인 건 사실이었다. 점수 차가 줄어들면서 불안감을 느꼈는데 이제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며 기뻐했다.

아버지 도움으로 척추수술 후 재활 성공
루이스가 유독 올해의 선수상에 욕심을 내는 이유가 있다. 루이스는 미국 대회인 LPGA 투어가 외국 선수들의 주무대로 굳어져 가는 걸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했다. 실제로 LPGA 투어 올해의 선수상 역대 수상자 명단에는 1994년 베스 대니얼(56·미국) 이후 18년 동안 미국 선수의 이름이 없다. 미국 언론은 외국 선수가 LPGA 투어에서 우승할 때마다 ‘도대체 미국 여자 골프 선수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는 식의 보도를 했다. 미국 여자 골프의 체면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루이스는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 카리 웹(호주), 로레나 오초아(멕시코) 등 최근 20년간 LPGA 무대는 외국 선수들의 잔치였다. 올 시즌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과연 올해의 선수상을 탈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다시 LPGA 투어의 흐름을 미국으로 가져온 주인공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루이스는 미즈노 클래식 우승으로 받은 진주 세트를 어머니 캐럴 루이스(53)에게 선물할 거라고 했다. 아버지에게는 맛 좋은 일본산 맥주 세트를 선물하고 싶은데 가져갈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도 했다. 루이스는 “가족 없이는 힘을 낼 수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청야니(대만)를 넘어 세계랭킹 1위가 되고 싶다. 이렇게 선물 공세를 펼쳐야 가족들이 끝까지 응원해 줄게 아닌가”라며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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