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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 女論

‘여류 작가’ 아닌 그냥 작가 되려 했던 임순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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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내가 얼떨결에 작가라는 딱지를 붙이게 됐을 때만도 별 감동도 별 야심도 없었지만 단 하나 여류 작가는 안 되리라. 어떡하든 그냥 작가가 돼 보리라 다짐했었다.”

 소설가 박완서가 1974년 에세이 ‘추한 나이테가 싫다’에서 했던 말이다. 당시만 해도 여성인 작가들에게는 ‘여류’라는 말을 붙여 ‘그냥 작가’인 남성 작가들과 차등을 두려 했다. 박완서는 이 말을 굴욕적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의 문학 인생의 목표를 ‘그냥 작가가 되는 것’에 두었었다.

 ‘여류 작가’라는 말은 한국문단에 여성이 등장하면서부터 남성 작가와 구별하기 위해 종종 쓰여 왔는데, 초창기 대부분의 ‘여류 작가’들은 이 호칭에 대한 자의식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여류’라는 말을 프리미엄이라 여기며 자임하기도 했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에도 박완서처럼 ‘여류 작가’라는 말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인 작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임순득(任淳得)이다. 1937년 ‘일요일’이라는 소설로 등단하여 소설가·평론가로 활동한 임순득은 ‘여류 작가의 지위’(조선일보, 1937.6.30~7.5)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작가로서 출발을 하여 우연히 다만 성적으로 여자였다’가 옳은 순서임을 주장했다.

 “지금까지 역사에서는 한 개의 나쁜 습관이 지속되어 왔다. 예를 들면 작가를 논할 때에도 마치 성적 차이를 각각의 본질에서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작가와 여류작가를 구별하여 왔다. … 금일의 부인 작가는 작가로서 출발을 하여 우연히 다만 성적으로 여자였다는 것이 아니고 그 발생에서부터 여류작가로서 예정된 메뉴에 속한 인적 표현인 것이 본상(本相)이었다. 아아 이것이 불행의 시초였다. 여자라는 우연을 등에 짊어진 인간은 그러므로 작가일 수 없을 것인가?”

 이렇게도 ‘여성’ ‘여류’라는 꼬리표를 떼느라 선대의 여성들이 고생을 했는데 ‘여성’ 대통령이라니, 시대착오적인 감이 없지 않지만 이런 토론이 촉발된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다. ‘여성들에게 있어 대통령 선출이 지니는 의미’를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우리는 그냥 대통령을 뽑는 것이지 여성 대통령을 뽑는 것도 남성 대통령을 뽑는 것도 아니다. 유권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후보의 성별이 아니라 후보의 성평등 의식, 성인지적 관점, 그리고 여성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우대정책 공약이다. 임순득 식으로 말해 ‘대통령을 뽑고 나서 우연히 다만 성적으로 남자/여자였다’가 맞는 순서인 것이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