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의 음악 읽기] 세상의 무게 일깨우는 이 오싹함이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95호 27면

다음 날 아침 방송이 없어 여유가 생기는 금요일 밤에 연달아 네 편, 올해 나온 영화들을 감상했다.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는데 시계를 보니 아침이다. 대책 없이 막막한 홍대 인디밴드 멤버들에게 얽혀 들어가 좌충우돌하는 마포구청 공무원의 행각을 그린 ‘나는 공무원이다’. 악역 맞춤형 외모로 태어난 배우 윤제문이 무사안일의 극치이자 착한 공무원 노릇을 한다. 이어서 언제나 흥행에 실패하는 영화에만 출연하는 일급배우 김명민의 ‘간첩’. 남파간첩이 5만 명에 달한다는 ‘속설’을 비틀어 남반부 조국을 구하는 일보다 먹고사는 일이 훨씬 다급한 생계형 간첩들을 코믹하게 그렸다. 코믹물이지만 조금 웃기고 많이 씁쓸한 영화.

펜데레츠키의 오페라 ‘루덩의 악마(The Devils of Loudun)’

유오성·장동건의 ‘친구’가 대박 난 이래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온 곽경택 감독의 신작 ‘미운 오리 새끼’도 보았다. 1990년대 복고가 유행인 시절에 80년대 군대와 방위병의 애환을 그렸으니 또 흥행에 실패할 수밖에. 하지만 작품은 매우 훌륭했다. 전체주의적 사회 분위기에서 부적응자로 살아가는 삶의 애환이 슬프고 웃기다. 졸림을 무릅쓰고 한 편 더 도전한 영화는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들의 흥망성쇠를 그린 ‘청춘 그루브’였다. 흔한 말로 청춘의 성장통을 그린 거친 영화. 그런데 의자 뒤로 느슨히 기댔던 몸이 놀란 듯이 바짝 세워진다. 숨어 있는 수작이었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배우 봉태규의 복귀작이기도 하고.

영화 중에서도 한국영화, 그중에서도 저예산 영화를 더 즐겨 보는 것은 실물감 때문이다. 그런 영화들은 세트 대신에 실제 공간을 활용하고 대자본이 투자되지 않은 덕분에 거리낌없이 실제의 상품과 업소와 사람이 등장한다. 소위 전문가들이 대중심리에 거슬리는 대목을 깎고 다듬은 흔적도 없고 감독이나 배우들의 고심참담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다. 혹시 ‘무산일기’나 ‘똥파리’ ‘파수꾼’을 안 보았다면, ‘로맨스 조’ ‘애니멀 타운’ ‘바람’ 같은 작품을 놓쳤다면 홍상수의 모든 영화와 더불어 꼭 보기를 권한다. 죽인다.

오페라 ‘루덩의 악마’의 원작인 올더스 헉슬리의 동명 소설 표지.

오후에 잠을 청하기로 하고 지금은 펜데레츠키(위 사진)의 오페라 ‘루덩의 악마’ LP 박스 세트가 눈앞에 놓여 있다. 저 곡을 또 들을 생각을 하니 지긋지긋하다. 혹시 누가 영화 네 편을 연달아 보고 왜 또 오페라를 들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말하겠다. 극기훈련이라고, 푸하하. 영화는 쉽고 음악은 어렵다. 사용하는 감각기관의 숫자 때문이다. 청각과 시각을 동원하면서 줄거리까지 있으니 아무리 지루한 영화라도 풍경 감상이라도 하게 된다. 하지만 음악은 부산하고 산만하게 작동하려는 신체의 기관들을 최소화하고 오로지 청각 하나에만 집중해야 한다. 거기에다 자기 상상력까지 보태야 하니 클래식 음악 감상은 더 고역이다. 그런데 왜 들어야 하느냐고? 극기….

폴란드 작곡가 펜데레츠키는 1933년생, 올해 여든 살로 아직 살아 있다. 연주자의 재량을 한껏 확장한 불확정성 작곡 기법으로 각광받았고 ‘음향음악’이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사운드 개척에 앞장선 인물이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유명작이다. 현대음악이란 기괴하고 파괴적이며 듣기 괴롭다는 고정관념에 딱 부합하는, 심히 어지러운 음악세계를 펜데레츠키가 보여준다. 그런데 듣기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LP음반점에 그의 것이 보이면 있는 대로 사들이곤 했다. ‘지금 괴롭다고 영원히 괴로운 것은 아니다’라는 오랜 경험의 법칙 때문이다. 분명 무언가 있는 작자인데 잘 모르겠다면 나 자신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과연! 그의 여러 유명작을 제치고 마침내 만나게 된 작품이 바로 오페라 ‘루덩의 악마’였다.

‘루덩의 악마’는 악마로 몰려 화형대에 오르는 난봉꾼 사제 그랑디에와 그에 대해 병적인 열정을 품고 있는 수도원장 수녀 잔느 데 장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악마의 소행으로 간주되는 그랑디에의 바람기 앞에서 필사적으로 그를 옹호하는 잔느의 모습은 불관용의 세상, 그 속에서의 모순되고 광기 어린 집착을 보여준다. 분노, 질시, 고문, 처형으로 이어지는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싹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낭창은 낭창이 아니다. 3막의 오페라 대부분은 신경줄을 거스르는 비명소리로 자욱하게 흘러간다.

경제가 어렵고 삶은 불안하고 위기는 장기화될 거라는데 우리는 놀랍도록 평온하게 살아간다. 지각하고 반응하는 사고 체계가 미디어 홍수 앞에서 마비된 것은 아닐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효의 사람이 자살하는 나라인데 혹시 자살자들이 그나마 온전히 삶의 고통을 느낄 줄 알기 때문이라고 추정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는 영화나 텔레비전을 보아야 하고, 자살로까지 이끄는 세상의 부하(負荷)를 깨닫기 위해서는 펜데레츠키가 필요하다. 그의 음악은 극기용 도구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영화로 행복했던 지난밤을 상쇄시키기 위해 오싹오싹한 ‘루덩의 악마’ 장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