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한 사회·운명에 대한 고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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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가오싱젠(高行健.61.사진) 의 『영산(靈山) 』이 마침내 『영혼의 산』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지난 몇년 간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대한 물망을 고려해보면 중국 작가가 조만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대세인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노벨상이 지니는 암암리의 정치성에 대한 예측에서 비롯하기도 하고 사실 중국의 개혁.개방 이래 빠진.아이칭.왕멍.베이다오 등 중국 굴지의 작가들이 한 해도 빠짐없이 후보로 거론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급기야 지난해 가오싱젠으로 결정되었을 때 중국 문학계는 마치 허를 찔린 듯한 당혹감에 휩싸였다.

표면상 그것은 그가 주목받던 대가의 반열에 속해 있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루고 우선 한국 독자들에게 생소한 이 작가의 수상작인 『영혼의 산』의 작품세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영혼의 산』의 내용은 간단히 말하면 주인공 '나' 가 '영혼의 산' 이라는 미지의 산을 찾아가는 실제와 환상의 순례기다.

소설속 작가인 '나' 는 작품이 비판을 받아 왔으며 아내와 헤어지는 등 곤경에 처해 있다. 그러다 폐암선고를 받고 절망하던 중 오진임이 밝혀진다.

불합리한 사회,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고뇌는 '나' 로 하여금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여행길에 나서게 하고 '나' 는 누군가에게서 원시림의 '영혼의 산' 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여행길에서 '나' 는 변경의 강족(羌族) 과 묘족(苗族) 등 소수민족의 원시종교와 민속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민간에 잔존해 있는 도교와 불교 의식에 동참하기도 한다.

'나' 는 향촌의 신화와 전설, 구전 가요에 심취하기도 한다.

여행은 실제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복했던 유년기로의 추억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나' 의 분신인 '당신' 과 '그' 를 통해 상상적인 여행을 감행한다.

이 여행길에서 여러 여인과 사랑을 시도하기도 한다. 실제와 환상이 교차하는 여행의 끝에 마침내 '나' 는 '영혼의 산' 에 다다른다.

'나' 가 도달한 '영혼의 산' 은 소설의 제80장에서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모든 것이 하얗다. 당신이 찾아다녔던 상태가 바로 이것이 아닌??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고, 아무 의미도 없는 그림자들로 이루어진 모호한 이미지들로 가득한 이 얼음의 세계 같은 상태, 즉 완전한 고독. "

소설『영혼의 산』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읽힐 수 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에서는 상흔문학(傷痕文學) 적 취지가 엿보이기도 하고, 자연에 대한 찬미와 우려에서는 생태주의적 관점이 나타나며 전통.민속에 대한 관심에서는 심근문학(尋根文學) 적 의도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여행, 길찾기라는 본질적인 성격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이 작품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불가해한 삶의 진상, 역사적.집단적인 차원에서는 중국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라는 중층적인 주제를 함유하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이 『도덕경』처럼 8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암시된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작가 가오싱젠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문화론적 입장이다. 가오싱젠은 중국문화의 정수를 한족(漢族) 의 유교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주변민족의 원시종교와 도교 등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은 전통적인 황하문명 중심론에서 벗어나 중국문화를 상호텍스트적.다원적으로 파악하려는 최근의 문화론적 경향과 상응한다.

가오싱젠이 추구하는 주변문화의 지식은 리오타르의 이른바 서사지식(Narrative Knowledge) 으로서 그것은 논리.규범 보다 설화의 역동성에 의존한다.

여기서 가오싱젠의 작품은 근대 서구소설의 목적론적 의미지향성을 거부하고 자발적 이야기성을 강조하게 된다.

『영혼의 산』이 동아시아의 전통소설 형식과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수신기(搜神記) 』라든가 『요재지이(聊齋志異) 』와 같은 고대 필기체 소설에서의 옴니버스 스타일의 설화편집과 현실과 환상을 교차시키는 진환병겸(眞幻幷兼) 의 기법은 『영혼의 산』에서 유감없이 수용되어 있다.

가오싱젠은 실상 모더니즘 작가로 출발했으며 누보로망.마술적 리얼리즘.메타픽션 등 갖가지 현대소설 형식의 세례를 받은 작가이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현대소설 형식을 재현함에 그치지 않고 전통의 '민족형식' 을 융합하여 '문학의 고갈' 이 운위되는 이 시대에 새로운 소설 형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감히 말하건대 동아시아 전통서사는 이제 그에 이르러 보편화의 계기를 맞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앞의 의문으로 돌아가서, 독자들은 왜 가오싱젠의 수상이 동아시아권에서 오히려 당혹스럽게 받아들여졌는지 그 이유에 대해 짐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소설문법에 얽매여 전통서사를 스스로 소외시켜왔던 실책이 아니었던가 한번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가오싱젠은…

가오싱젠은 1940년에 중국 장시(江西)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전문학과 예술에 대한 소양이 풍부했던 양친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성장했으며 베이징(北京) 외국어대학 프랑스어과에 진학해서는 연극활동에 열중하였다.

1980년대 초 그는 모더니즘 소설과 현대 부조리극의 작가로 주목받는다. 83년에 발표한 『버스정류장』은 베케트의 영향하에 쓰인 작품으로 중국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잘 드러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경제개혁에 대한 전망이 결여되었다" 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상연 금지된다. 실의에 빠진 그는 83년에서 84년 사이 수 차례에 걸쳐 양쯔강 유역에 대한 문화기행에 나선다.

이 여행에서 얻은 경험이 『영혼의 산』을 집필하는 토대가 되었다.

87년 가오싱젠은 중국을 떠나 독일을 거쳐 88년 망명지인 프랑스 파리에 안착한다. 89년 베이징에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 이에 항의해 중국공산당을 탈당한다. 이 해에 탈고된 『영혼의 산』은 90년 대만에서 출판되었다.

2000년 그는 마침내 『영혼의 산』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2001년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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