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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빽빽하거늘 비는 쏟아질 줄 모르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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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호 13면

드높아야 할 하늘에 잔뜩 구름이 끼었다. 이 가을 대선 정국은 그야말로 밀운불우(密雲不雨) 형국이다. 구름은 빽빽한데 비는 쏟아질 줄 모른다. 장쾌하게 쏟아지는 비는 희망이다. 목마른 대지가 머금어야 할 생명의 양식이기도 하고 시대를 이끌어갈 대인이기도 하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⑭

결실의 계절인 이 가을, 풍요를 노래할 수만은 없는 나날이다. 세상 일이 배배 꼬여 있고 답답하다. 가을걷이 하는 들판의 저녁 연기는 달콤했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전원에서 살았던 기억 속에서만 그랬고 지금 도시의 공기는 우울하다.

인간은 이야기를 먹고 사는 존재다. 이야기는 재미와 감동을 생명으로 한다. 신나는 화젯거리를 만들어야 할 대중 정치인이 잊지 말아야 할 금언이다. 사람들은 무료해서 드라마를 보고 게임하고 트위터한다. 그런데 한낱 트위터로 유명한 대중작가를 앞다퉈 만나다니! 웃지 못할 촌극이다.

새롭지 않은 인물로 새 정치 하겠다니
사민불권(使民不倦).
주역에서 지도자가 지녀야 할 미덕으로 꼽는 말이다. 모름지기 지도자라면 국민으로 하여금 권태롭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안철수·문재인 세 후보 진영에 빽빽하게 모인 사람들이 정치판 퇴물들이거나 수작이 빤한 이들이어서 국민이 하품한다. 지겨운 그 인물들이 ‘나라를 위한 결단’이라고 둘러댈 때는 눈꼴시다.
“쳇! 나라는 이제 그만 위하고 봉사활동이라도 제대로 해보라지.”

소주잔을 기울이던 사람들이 코웃음을 친다. 그들은 안다. 퇴물 정치인들은 절대 육체노동 할 족속들이 아니라는 걸.

주역은 변화의 철학서다. 변해야 통한다. 변해놓고도 안 통한다면 제대로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더 변해야 한다. 국민통합이건 정권교체·정치혁신이건 새로워야 국민이 따분해하지 않는다. 전혀 새롭지 않은 인물들을 불러다 놓고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면 국민은 걱정한다.

백두옹은 노탐(老貪)을 경계한다. 비우고 또 비우며 지혜롭게 늙어온 도인이지만 그에게는 아직까지도 버리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다. 바로 희망의 유혹이다. 백두옹은 그 숱한 절망 속에서도 끊임없이 희망을 낚아왔다. 페루의 바닷가를 무대로 한 어느 우울한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그랬다. 그는 ‘삶의 심연 속에 숨어 있다가, 황혼의 시간에조차도 문득 찾아와서 모든 것에 빛을 던져줄 수 있는 행복의 가능성을 남몰래 믿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백두옹을 몽상가로 치부한다. 남북관계도, 국제정세와 세계경제도 모두 절망적이기만 한데 무슨 근거로 한반도가 세계 중심이 된다는 거냐고 비웃는다. 근거로 들고 있는 한국역학 정역(正易)이라는 것, 따지고 보면 코너에 내몰린 약자가 변통해낸 자위책이 아니겠느냐고 따진다. 강권 교수도 그중 하나다.

“진흙이 많아야 큰 조각상을 빚을 수 있네. 어려울 때 큰일을 해낼 수 있는 ‘그 사람’, ‘정도령’이 출현하는 거라고.”

“솔직히 박근혜·안철수·문재인 세 후보에게 희망을 걸 수 있나요? 열광하는 국민들은 좀처럼 못 보겠거든요. 정책과 비전이 흐릿하고 역량도 모두 그만그만해 보여서요.”
현실적인 강권 교수는 회의적이었다.

“국민들도 변해야 해. 자신들은 하나도 안 변하고 지도자만 변하라고 하면 돼? 구세주, 메시아가 저절로 나오남?”

백두옹은 서가에서 성경을 꺼내 펼쳤다. 그는 구약성서 민수기 12장 3절을 가리켰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상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강권 교수는 소리 내 읽었다.

“자네는 애급(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도해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킨 모세가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인 줄 알았겠지.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모세는 소심한 인물이었다고 하네. 소명감이 있으면 사람은 변하는 거고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따르면 기적을 일구는 거야. 홍해가 갈라진 것처럼 말일세. 야훼로부터 받은 십계는 당시 백성들의 간절한 열망이 아니었겠나. 전에도 일렀듯 시절운이 맞으면 정도령이 나오네. 여성이라고 혹은 내향적인 인물이라고 못할 게 없어.”

백두옹은 성경을 여러 주역 책들 사이에 다시 꽂았다.

“어르신은 참 종횡무진이시네요. 성경은 언제 또 그렇게 꼼꼼히 보셨어요?”

강권 교수는 혀를 내둘렀다.

“나는 사람들이 즐겨 보는 책이면 어느 것이든 가리지 않는다네. 그 속에 인류의 오래 묵은 소망과 지혜가 담겼거든. 아무튼 메시아를 너무 거창하게 여기지 말라는 얘기네. 효자는 부모가 만들고 메시아는 당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거니까.”

“백세청춘이십니다.”

“청춘은 사양하네.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니까 질풍노도의 젊은 날이 아름다운 거지, 청춘은 본래 암담한 거야. 열정은 큰데 가진 건 없고, 한 치 앞도 안 보이니 왜 아니겠어. 열심히 부딪치고 깨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이 열려.”

백두옹은 수(需:) 괘를 뽑았다. 위는 물, 아래는 하늘로 하늘에 구름이 빽빽한 형국이다. 비로 내릴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모든 기다림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법이다.
“돌이켜 보면 한 평생이 기다림의 연속이었네. 사람을 기다리고 때를 기다리고. 귀인을 만나면 일이 잘 풀렸지만 악인을 만나면 일이 꼬였지. 때가 좋으면 만사형통이었지만 때가 사나우면 만사불통이었어.”

“그러다 지칠 땐요?”

강 교수는 지혜롭게 늙은 백두옹의 눈을 응시했다.

“노래했지.”

“예?”

“노래 불렀다고.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도 부르고 장밋빛 인생도 부르고. 남루한 시절, 겨레의 한을 달래준 가수 김정구는 우리 모두의 친구였네. 거리의 가수, 에디트 피아프도 그랬고. 계절 탓인가? 그녀의 애절한 샹송 가락이 귓전에 맴도는군.”

백두옹은 모처럼 감상적으로 읊조렸다. 강 교수는 에디트 피아프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떠올렸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창녀촌에서 비참하기 짝이 없는 유년기를 보낸 그녀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

‘너무 외롭고 너무 보고 싶어. 그러니까 배로 오지 말고 비행기 타고 와. 배는 너무 오래 걸려.’

미국 공연을 갔던 그녀는 유명 권투선수 마르셀에게 국제전화를 건다. 그녀가 만난 유일한 참사랑이었다. 그녀는 사랑을 목마르게 기다렸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던 마르셀은 추락사하고 만다. 자책하던 그녀가 마르셀을 위해 바친 노래가 ‘사랑의 찬가’다. 그녀는 당신이 원한다면 조국도 친구도 버리겠다고 울부짖는다.

“그러고 보니 힘겨울 때, 국민을 위로하는 노래를 불러줄 줄 아는 지도자가 진정한 지도자 같네요.”

“바로 그걸세. 사회 구석구석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내는 불협화음을 잘 조율(調律)하는 게 정치야. 강 교수, 그거 아는가? 조선 최고의 정치가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은 모두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네. 절대음감까지 타고나서 악공들이 제례악을 연주할 때, 오류를 정확히 지적해내셨어.”

백두옹은 서가 옆에 세워두었던 거문고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줄을 고른 그는 오른손에 술대를 쥐고 줄을 뜯기 시작했다. 깊은 우물 속에서 용이 우는 듯한 소리가 나왔다. 거문고 뜯는 신선의 풍모가 완연했다. 강 교수는 마지막 조선인 백두옹이 내는 조선의 소리에 빠져들었다. 가슴과 머리가 청아한 대숲바람에 씻기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맑고 잔잔한 가을 호수처럼 평정해졌다.

국민 대신 속 시원히 울어줄 후보가 없네
세심(洗心). 주역의 또 다른 이름이다. 주역 철학의 본질은 결국 복잡한 마음을 씻고 새롭게 변화의 조짐을 꿰뚫어보는 일이다. 따라서 어려운 한자를 모르고 굳이 경전을 읽지 않아도 주역을 알 수 있다. 마음 안에 저마다의 하늘이 있고 신(神)이 있다. 결단의 순간에 잘 판단이 서지 않을 때, 그 하늘과 신에게 바른 도리를 물으면 그 속에 정답이 있다. 그래서 마음을 획전역(劃前易)이라고 한다. 괘로 그리기 전의 역학이라는 뜻이다. 리더들은 판단을 그런 식으로 내린다. 많은 데이터들은 참고 사항일 뿐, 결단은 그가 한다. 그래서 리더는 고독하다.

한 바탕의 연주가 끝났다. 강 교수는 앉은 자세로 절했다.

“과연 우리 풍류는 멋스럽고 운치 있습니다. 핫팬티 입고 정신없이 흔들어대는 걸그룹에 비할 바가 아니군요.”

“나는 걸그룹도 좋아하는 걸.”

백두옹이 특유의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옛 시 한 소절을 읊었다.

“이조명춘(以鳥鳴春)하고 이뢰명하(以雷鳴夏)하고 이충명추(以蟲鳴秋)하고 이풍명동(以風鳴冬)이라. 새로써 봄을 울고, 우레로써 여름을 울고, 벌레로써 가을을 울며, 바람으로써 겨울을 울도다. 대개 만물은 평정심을 잃으면 울게 마련이지. 나는 방금 거문고로써 한바탕 울어본 것뿐일세.”

“왜 아취 있는 풍류를 하시면서 운다고 하십니까?”

강 교수가 무안해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말씀을 답변으로 돌려줌세. 사람은 꼭 슬플 때만 우는 게 아니라오. 너무 기뻐도 울고 분해도 울고, 외로워도 울고 행복해도 울고, 사랑해도 우는 거라오. 지금 대권에 도전한 세 후보도 저마다 자기 포부를 펼치고자 전국을 돌며 울고 다닌다고 할 수 있지. 대선판이야말로 세 후보가 펑펑 울기에 더없이 좋은 호곡장(好哭場)이 아니런가! 그런데 국민 대신 속 시원하게 울어주는 후보가 안 보여!”

백두옹은 괘 막대를 집어 들었다. 수괘의 모든 효를 반대로 바꾸었다. 이른바 착괘(錯卦)라는 것이었다. 궁하면 뒤집거나 모조리 바꾸는 게 주역의 요체다. 그러자 진(晉:
) 괘가 되었다. 지상 위로 태양이 솟구쳐 나아가는 형국을 뜻했다.

“야권후보 단일화가 결판나기까지는 세 후보들의 행보가 지지부진할 테지. 답답하게 마냥 기다리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가 나가보세.”
백두옹은 강권 교수의 소매를 잡아 이끌었다.
“서두르자구. 비전(秘傳)의 터로 안내할 테니까.”



김종록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밀리언셀러 『소설 풍수』와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바이칼』 등을 썼으며 중앙일보에 ‘붓다의 십자가’를 연재했다. 본지 객원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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