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름' 주연들 "생각만해도 소름 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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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배우에겐 미안했지만 대뜸 "담배를 피우느라고 힘들었겠다" 고 물었다.

12일 개막한 제5회 부천국제팬태스틱영화제(20일까지) 의 폐막작으로 선정된 '소름' (윤종찬 감독.다음달 4일 일반 개봉) 의 주연 배우 장진영(27) 과 김명민(28) 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회한을 뱉어내듯 그들이 영화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장면이 숱하게 등장해 던진 질문이었다.

장진영이 입을 열었다. "사실 평소 다섯 개비 정도 태웠는데 촬영 기간 중엔 심할 경우 하루에 세 갑을 비웠어요. 고문이었어요. "

김명민이 받았다. "그래도 진영이는 나은 편입니다. 저는 원래 담배에 손도 안 댔는데, 이번엔 담배 때문에 실신까지 했습니다. 구토는 말할 것도 없구요. "

그만큼 힘겨웠다는 뜻이다. 어느 영화라고 쉬운 게 있으련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몸도 마음도 망가졌다. 거진 폐인이 됐다" 고 말했다.

장진영은 "지겹다, 지긋지긋하다" 고까지 했다. 촬영 당시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게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를 알리려는 수사(修辭) 일뿐. 그들은 제법 상기된 표정이었다.

실제로 장진영과 김명민은 '소름' 으로 연기의 한 획을 그었다. 베테랑 배우들도 하기 힘든 복합적 캐릭터의 겉과 속을 신인 배우치곤 매끈하게 소화했다. 배우로서 한 계단을 올라선 모양새다.

'소름' 은 고아 출신의 택시기사 용현(김명민) 과 아이를 잃고 남편에게 학대받는 편의점 종업원 선영(장진영) 간의 사랑과 파국을 축으로, 소위 운명이란 단어에 숨겨진 폭력성을 그린 독특한 심리 스릴러.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지만 선영의 사랑으로 평화를 얻으려는 용현과 남편의 잦은 주먹질과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무기력하기만 한 선영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영화는 이들의 출생에 담긴 비밀과 현재의 초라한 일상을 중첩시키며 으시시한 공포감을 빚어낸다.

장진영은 "다시는 못할 것 같다" 고 했다. 지금이야 젊어서 정신적.육체적으로 견뎌냈지만 나이가 더 들어선 이겨낼 수 없을 만큼 선영이 처한 상황이 비극적이라는 것.

하지만 그는 '자귀모' (1999년) , '반칙왕' '싸이렌' (2000년) 의 조연에서 이번엔 당당한 주연으로 터를 닦았다.

특유의 예쁘장한 마스크와 생머리를 버리고 멍자국이 가득한 얼굴과 고슴도치 같은 더벅머리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에 데뷔한 김명민의 감회도 깊다. 지난해 MBC 드라마 '뜨거운 것이 좋아' 로 신인 연기상을 받으며 실력을 검증받았던 그는 아무런 가책 없이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에겐 병적으로 집착하는 캐릭터를 거뜬히 연기했다. 막판의 이글거리는 눈빛 연기는 살벌하기까지 하다.

"용현이라는 인물은 분석하기가, 즉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지극히 즉흥적인 성격이죠. 신고식 한번 단단하게 치른 것 같습니다. "

그들이 가장 고생했던 부분은 영화 막바지에 삽입된 10여분 가량의 롱테이크(카메라를 고정시키고 한 장면을 멀리서 계속 찍는 것) 장면.

각각 연못가와 모텔방에서 상대의 사랑을 의심하고 심하게 다투는 부분으로 리허설만 열번 넘게 했다. 중간에 일부라도 삐긋하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영화에선 정말 예쁘고 고운, 즉 여성다운 역할을 맡을 겁니다. " 장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훤칠한 키, 상큼한 이미지로 여배우 가뭄에 시달리는 작금의 충무로에서 캐스팅 1~2위를 다투는 그다.

"시나리오가 40여편 넘게 들어왔지만 아직 후속작은 결정하지 못했어요. 요즘 한국영화가 붐이라 기획되는 것은 많지만 시나리오는 예전보다 치밀하지 못한 것 같아요" 라며 뼈 있는 말을 던졌다.

96년 SBS 공채로 연예계에 입문, 뒤늦게 빛을 보기 시작한 김명민이 농을 던진다. "남자 파트너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니야□" 굵고 낮게 깔리는 음성이 매력적이다. 발음도 정확하다.

성우 한번 해보라고 하자 "제가 연기를 못하나요" 라며 섭섭해 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 21일 시작하는 SBS 주말극 '아버지와 아들' 에도 출연한다.

*** 영화 '소름' 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한국 영화를 만들었다" 는 윤종찬 감독의 말처럼 '소름' 은 색다른 작품임에 틀림 없다.

다소 느슨하게 전개되는 초반부만 보면 이런저런 마음의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두 남녀의 사랑 찾기로 비칠 수 있으나 후반부에 가선 분위기가 1백80도 달라진다.

전반부에 깔아 놓은 복선이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얼굴' 을 드러내 관객들을 제법 섬뜩한 공포 속으로 몰고 가는 것.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그래서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낡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절망에 가까운 사랑을 희구하는 두 남녀의 몸짓 하나하나가 안쓰럽다.

'소름' 은 지난해 여름 극장가를 도배했던 한국 호러물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공포를 던져준다. 선홍빛 핏자국도, 엽기적 살인 장면도 거의 없다. 뭐랄까. 개인의 의지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짓눌린 초라한 인간상을 구현한다. 본인도 모르게 빠져드는 불가해한 힘 비슷한 것이랄까.

반면 대중적인 흡입력은 미지수다. 작품 전체를 꿰뚫는 연출력은 살아 있지만 관객들이 몸서리 칠 만큼의 자극적 화면을 절제해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등장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꼼꼼하게 비교하는 게 감상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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