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7시쯤 서울 서교동 디지털문화예술아카데미 사무실. 아니 장소가 잘못됐다. 김지하(64) 시인이 독자 91명과 2시간30분간 토론을 벌인 공간은 10평 남짓한 사무실이 아니다. 아카데미의 인터넷 홈페이지(www.artnstudy.com)에 마련된 '시인과의 대화'란 이름의 채팅방, 즉 사이버 공간이다. 사실 걱정이 앞섰다. 김지하는 만년필을 고수하는 몇 안 남은 시인이다. 그런 그가 디지털 문화의 정수랄 수 있는 채팅에 도전한 것이다. 시인 열 명이 4월 1일까지 차례로 참가하는 채팅 행사에 그가 나서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여태 서너 번 컴퓨터 앞에 앉아보긴 했단다. "그런데 왜 채팅을…"하고 묻자 그는 "무슨 영물인가 구경하러 나왔수다"고 답한다. 태연해 보였던 시인은 그러나 채팅 시간이 다가오자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하나 모든 게 기우였다. 몇 번 자판을 두드리다 아카데미 직원에게 슬쩍 자판을 밀었지만 독자들이 우르르 쏟아내는 질문에 그는 능숙하게 대처했다. 채팅에서 웃을 때 쓰는 'ㅋㅋㅋ'도 자주 날렸다. 무엇보다 그의 시 상당량이 구술시로 알려진 것처럼 답변은 이내 시가 됐다. "나는 (술을) 마신 게 아니라 (술에서) 헤엄을 쳤습니다" "아무거나 먹습니다. 고긴 더욱 좋고, 풀도 그저 좋지요"라는 답처럼 실시간 대화에 운율이 배어났다.
아픈 질문도 있었다. 누군가" 1990년대 초 분신 정국 때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는 글을 쓴 이유"를 따져묻자 시인은 "운동권 선배로서 손뼉을 치겠습니까, 침묵을 택하겠습니까. 생명을 살리면서 끝까지 운동을 연속시키라는 부탁이었습니다"고 진지하게 응수했다.
고 김수영을 라이벌 시인이라고 고백하고 "세상에서 가장 모호한 게 무엇이냐"는 물음엔 "마누라 속마음"이라고 눙치기도 했지만 대화는 시종 진지한 편이었다. 생명사상에 관한 심오한 질문과 답변이 대화 내내 이어졌다. 시인은 "낳고 낡고 병들고 죽는 것. 이 전체가 생명입니다"고 갈무리했다. 시인이 사이버 공간에 남긴 마지막 말은 "기회 닿는 대로 '새새대기'로 합시다. 채팅의 우리말입니다"였다. 채팅을 끝내고 그는 아이처럼 웃었다. 그리고 대화문 전부를 출력해 가져갔다. "새로운 공부거리가 생겼다"고 말했다.
글=손민호, 사진=김상선 기자
입장하고 퇴장하고
한 판의 연극이로다
손가락 끝으로 대화를 하니
입에 손가락이 달린 것 같다
여기야말로
'화엄의 장'이올시다
새새대기로 합시다.
채팅의 우리말입니다.
내 라이벌은 김수영 시인 …
난 술을 마신 게 아니라
술에서 헤엄쳤소 …
세상에서 가장 모르겠는 건
마누라 마음 …
- 김지하 시인의 채팅 말말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