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윔블던] 샘프라스 시대 막내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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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코트의 황제', '90년대 최고의 선수' '윔블던의 사나이'.

지난 10년간 피트 샘프라스(미국)를 따라다니던 화려한 수식어들이 3일 열린 윔블던 16강전에서 빛을 잃었다.

샘프라스는 이날 스위스의 신예 로저 페더러(19)와 접전을 벌인 끝에 2-3으로 무너져 이제 그의 시대도 끝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성급한 관측마저 불러일으켰다.

샘프라스는 96년 8강전에서 리하르트 크라이첵(네덜란드)에게 진 것이 윔블던에서의 유일한 패배였고 이후 31연승을 이어오며 통산 전적 56승1패의 경이적인 승률을 자랑해왔기에 이번 패배는 충격이었다.

또 샘프라스가 이번에 우승했더라면 골프의 타이거 우즈(미국)처럼 역사에 남을 신기록들이 무더기로 작성될 수 있었기에 본인은 물론 팬들의 아쉬움 또한 컸다.

윌리 렌쇼(영국)와 함께 보유한 대회 최다우승(7회) 기록 경신 및 비외른 보리(스웨덴)의 5연패 기록에 타이를 이루는 데 실패했고 메이저대회 최다우승(13회) 기록을 하나 더 늘리는 것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샘프라스는 "아다시피 위대한 것들은 오래가지는 않는다"면서 "오늘은 그저 목표에 조금 못 미쳤을 뿐"이라며 애써 담담하려 했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히 가방을 챙겨 사라지는 모습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퇴장을 연상케 했다.

주위에서는 그의 이번 대회 부진이 일회성 이변이 아니라 연령적으로 퇴조기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윔블던 우승 이후 한번도 메이저대회 우승을 하지 못했고 예전 같은 대포알 서비스와 전광석화같은 발리가 실종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US오픈에서 결승에 진출했을 뿐 올해는 호주오픈, 프랑스오픈, 그리고 이번 대회까지 한번도 8강 문턱에 가보지 못했고 그 흔한 투어 타이틀 하나 못 따냈다.

올시즌 전적은 윔블던 전까지 15승10패로 과거와는 판이하다. 나이 또한 다음 달이면 30대로 접어든다.

이러한 요인들은 윔블던을 앞두고 샘프라스의 은퇴설까지 나돌게 했고 샘프라스는 이를 부인하느라 공식 인터뷰까지 하는 등 진땀을 뺐다.

일부 전문가들은 그의 실력 자체가 다른 선수들을 압도하던 시기는 지났다고 보고 있고 마라트 사핀(러시아) 등 20대 초반 강호들과 로저 페더러(스위스), 앤디 로딕(미국) 등 '무서운 10대' 들의 기량이 날로 발전하고 있어 샘프라스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한 분야에 '황제'가 둘이 될 수 없듯 그동안 코트를 누벼온 샘프라스도 '황제'란 닉네임을 다른 선수에게 물려줄 때가 된 듯하다. (서울=연합뉴스) 이승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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