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사 30%가 "아이 원하지 않는다" …여의사 2만명 시대 빛과 그림자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 외과의사 봉달희 한 장면 <사진 중앙포토>

여의사 전성시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는 112년 전 김점동(박에스더) 여사. 이후 매년 수 명에서 수 십 명씩 배출돼 오다 최근 한해 1000여 명이 넘는 여학생이 의대를 졸업하고 있다. 현재 의사협회에 등록된 여자의사는 2만2938명으로 전체 29.245%를 차지한다. 하지만 여학생의 비율은 더 많다. 현재 의대 여학생 수는 전체의 40%에 달한다. 연세대의대 해부학교실 박경아 교수(세계여자의사회장)는 “이런 추세로 10~20년이 지나면 오히려 여자 수가 더 많아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의사회가 아니라 남의사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실제 고대의료원, 삼성서울병원 등 몇몇 병원은 입학생 수나 인턴 수가 여성이 남성을 앞지르기도 했다. 김나영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여의사는 이제 더 이상 소수가 아니다”고 말했다.

전문의시험 수석 여성도 많아져
여의사는 숫자만 많아진 게 아니다. 성적도 좋아졌다. 2007년엔 26개 전문 과목 중 소아과, 산부인과, 정신과, 성형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가정의학과, 산업의학과 9개과에서 여성이 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의사고시•전문의시험에서도 여성 수석자가 2~3년에 한 번씩은 나온다. 여성의 절대적인 숫자가 남성에 비해 적은 것에 비하면 약진이다. 고대의대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의대 수석졸업자가 모두 여성이었다. 연세대의대의 경우 작년과 재작년 의대 졸업 수석자가 모두 여성이었다. 삼성서울병원 흉부외과 2년차 전공의 김인숙 씨는 “여자들이 더 독하고 열심히 하는 것 같다. 상위권은 거의 여자가, 하위권은 남자들이 채울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여의사가 많아지면서 병원도 달라지고 있다. 예전엔 여자의사들은 남자의사와 같이 옷을 갈아입고, 자고 먹고 해야 했다. 하지만 여자의사 비율이 늘면서 인턴실이 늘고 탈의실도 따로 마련됐다. 수술실 분위기도 밝아졌다. 대학병원 내과 1년차인 김상철(가명•29)씨는 “인턴 실습을 돌 때도 여자가 끼여 있으면 실습 돌기가 훨씬 수월하다. 어떤 때는 다 남자만 모여 해당 과 실습을 도는 경우가 있는데, 아무래도 교수님의 폭언과 발길질을 받기도 하고, 욕설도 오간다. 하지만 여학생이 있을 때는 다르다. 온화한 분위기 아래 실습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습 조를 짤 때 여자 동료를 꼭 끼우려고 하는 경향도 있다”고 말했다.

‘술 먹는’ 회식 문화도 줄었다. 세브란스병원 외과 안지영 교수는 “여의사들이 많아지기 시작한 초창기 때는 과마다 여자들이 꼭 한 두 명 이상씩 끼게 되면서 교수님들이 ‘술자리가 재미 없어졌다’고 푸념하듯 말했다. 남자들만 있으면 갈 수 있는 술집도 자연히 가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대신 영화보기•뮤지컬보기•맛집 등 보다 건전한 회식 문화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처음엔 불편해하던 교수들도 차츰 익숙해지면서 집에 빨리 들어가고 몸도 축나지 않아 좋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전공 지원 양상도 달라졌다. 여학생의 성적이 좋다 보니 여성성향이 강한 피부과•영상의학과•정신건강의학과 등은 성적 좋은 여성이 대거 지원해 여초 현상을 빚는다는 것. 서울성모병원 유모 인턴은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과 지원 양상을 보면 흔히 말하는 편하고 좋은 과는 공부 잘하는 여의사들이 독점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성적 좋지만 외과 스스로 선택하는 여성 많아
하지만 여성들이 편하고 돈 많이 버는 과만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박경아 교수는 “여성의 절대 수가 늘어남에 따라 외과나 흉부외과 등 남성 성향이 강한 과로 진출하는 여의사도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 안지영 교수는 “우리 병원 외과의 30%는 여자의사”라며 “이제 외과계열은 더 이상 금남의 구역이 아니다”고 말했다. 삼성서울병원의 경우에도 전체 외과 계열의 30%가 여자의사이며, 2010년에는 여자 외과 지원자가 남자와 같은 수였다.

하지만 이런 도전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안지영 교수는 “처음엔 여자가 어떻게 할 수 있겠냐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여자가 외과 의사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외과를 선택해 교수를 하고 있는 지금도 여자라서 그런지 더 꼼꼼하게 수술한다는 평을 많이 듣고 있다”고 말했다.

또 여자 외과의사는 섬세하고, 마무리가 깔끔하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상황판단이 빨라 돌발변수에 대한 임기응변이 빠른 장점도 있다. 안 교수는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남성들은 한 곳에 집중하면 다른 곳은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들은 동시에 몇 가지를 하는 멀티테스킹이 잘 된다. 수술에서도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남자 의사들은 해당 부위 수술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자의사들은 해당 부위에 집중 할 뿐 아니라 다른 위험 가능성까지 신경 쓰며 수술 하는 능력이 더 낫다고 하는 평을 많이 듣는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남자보다 여자에서 유능한 외과의사가 많이 나올 것 같다고 전망하기도 한다. 안 교수는 “현재 외과 지원율이 바닥을 친다. 그럼에도 외과를 지원하는 양상을 보면 여자는 거의 100%가 자신이 원래 외과를 지원하고 싶어 온 경우가 많은 반면 남자는 성적이 안되거나 다른 과에서 떨어져서 외과로 온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성적이 특출한 여학생들이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원래 하고 싶었던 것을 개발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르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단 정형외과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익명을 요구한 모 대학 교수는 “솔직히 힘은 남성에 비해 달리는 게 사실”이라며 “정형외과 같은 경우 수련의 2~3년 동안 주로 하는 일이 환자 다리를 몇 시간씩 들고 있거나 톱 같은 기구로 자르는 거다. 여자 중에서도 특히 근육량이 적은 학생이라면 힘들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여의사 30%가 “아이 갖지 않겠다”
하지만 이런 여의사들의 약진에도 아직 처우는 열악한 게 사실이다. 여의사들이 직업에 있어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출산과 육아에 관한 것. 강남세브란스병원 외과 박정수 교수는 “수련의 등을 뽑을 때 단연 여학생이 눈에 띈다. 여학생이 수술, 논문조사, 연구 등에서도 꼼꼼하게 잘 해내고 업무처리도 깔끔하다. 하지만 정말 잘 하다가도 출산 후에 많이 힘들어하더라. 그래서 후임자나 제자들을 길러내야 하는 교수들 입장에서도 고민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아이를 아예 원하지 않는 여의사도 많아지고 있다. 실제 여자의사회가 여의사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의사의 30%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본인의 직업과 경력을 쌓는 게 아이 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반영된 결과다. S대병원 외과 K모 교수(38)도 “결혼 9년이 넘었지만 일부러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레지던트 수료와 전문의 시험, 교수 임용 등이 결혼한 즈음인 30대 초반과 중반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젠 아이를 가질 여유가 조금은 생긴 것 같다. 교수로서 자리도 잡았고, 수술 때 나를 선택하겠다고 고집하는 환자도 크게 늘었다. 이제 서서히 아이를 가져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반면 아이를 낳은 여의사들은 그 때부터 고난의 연속이다. 아직 수련의와 인턴을 노동자가 아닌 교육생으로 보는 탓에 최악의 근무 조건을 이겨내야 한다. 여의사회 조사에서도 결혼을 미루거나 임신을 미루라는 권고를 받은 여의사가 20%에 달했다. 임신을 했다고 봐 주지도 않는다. K 교수는 “더 시키진 않지만 덜 시키진 않는다. 때문에 유산이나 사고 등이 비일비재하다. 남몰래 우는 여의사도 많다. 과에서 촉망 받는 여자 전문의가 출산 때문에 고민하다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꽤 있다”고 말했다.

일부 교수들은 아직도 임신한 여자 전문의와 회의를 하며 담배를 피우고, 환자를 데리고 방사선과에서 X레이를 찍어 오게 한다. K교수는 “전공의 시절 여의사 동료가 임신한 상태였는데 환자를 데리고 X레이를 찍고 오는 업무를 맡게 됐다. 친구는 혼자만 유난 떤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철 옷을 입지 않고 그대로 X선실 안에 함께 있었다. 혹시 그 때문에 나중에 아이에게 기형이 생기지 않을까 죄책감에 자주 시달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에선 희망의 바람도 불고 있다. 분당서울대병원 김나영 교수는 “여의사들 수가 워낙 많아져서 이제 그들을 배려해주지 않으면 운영이 힘들어진 시대가 온 것 같다. 예전엔 여의사를 무시해도 금방 비슷한 수준의 대체 인력이 채워졌다. 하지만 이제 절반 정도가 여의사다. 그런 식으로 여의사를 내치면 다시 동등한 수준의 의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병원 경영 차원에서도 인재 확보를 위해 여의사 출산과 육아를 위한 안전 시스템을 마련하는 추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예전엔 1~2개월에 그치던 출산 휴가를 요즘엔 90% 이상이 3개월을 채우고 있다. 안 교수는 “적어도 서울 대형병원에서는 출산 뒤 법적으로 정해진 출산 휴가를 다 쓰도록 배려하고 있다. 단, 지방대학병원이나 중소병원은 아직 잘 지켜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보육 시설도 마련해주고 있다. 병원 안에 아이를 맡겨놓게 해 몇 주일씩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전공의 1~2년 차에게도 보육의 역할을 일정부분 할 수 있게 배려한 것. 승진에서도 차별이 사라지는 추세다. 김나영 교수는 “예전 같으면 출산 뒤 교수 임용에서 갑자기 밀려나거나 한 두 해쯤은 밀리게 돼 있는데 요즘은 그런 게 거의 없는 것 같다. 임원급으로 올라가는 여의사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여의사 시대가 저절로 이뤄진 건 아니다. 안 교수는 “이런 여의사들의 약진 뒤에는 남자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실습하는 여의사들의 노력과 눈물이 숨겨져 있다”며 “아직까지는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100을 하면 당연히 남자가 승진되는 사회 아니겠냐”며 “이런 차별 없이도 똑같이 능력을 인정받고 좋은 보직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기기사]

·여의사 30%가 “아이 원하지 않는다” …여의사 2만명 시대 빛과 그림자 [2012/10/08] 
·3만여 의사·가족들 운집, 의사가족대회 열기 '후끈' [2012/10/08] 
·박근혜, 문재인 대선 후보 한마음전국의사가족대회 참석 [2012/10/07] 
·대선 후보들, 의사가족대회에서 무슨 발언 했나 [2012/10/08] 
·복지부 혁신형제약기업 인증취소 기준 11월 마련 [2012/10/08] 

배지영 기자 jybae@joongang.co.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위 기사는 중앙일보헬스미디어의 제휴기사로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중앙일보헬스미디어에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