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2면

정진홍
논설위원

#고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시대의 작가인 박완서 선생은 생전 졸지에 자식을 잃는 ‘참척(慘慽)’의 아픔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녀는 꽁꽁 싸매놓아도 아픔이 끝 간 데 없이 배어 나오는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 작품을 남겼다. 그 누가 자식 잃은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자기 손을 놀려 글로 쓰고 싶었으랴. 정말이지 결코 쓰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누르고 또 눌렀으리라. 덮고 또 덮었으리라. 하지만 그래도 스멀스멀 피어나고 기어 나오는 억누를 수 없는 삶의 가장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던 그 무엇인가를 토해내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비로소 작가는 마치 신들린 듯 자기 손을 자기 의지가 아닌 그 뭔가에 홀린 듯 놀려 한 편의 글을 써냈으리라. 그리고 결코 길다 할 수 없는 그 글에, 하지만 너무나도 속절없는 절절함을 담담한 수다처럼 풀어놓은 그 글에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란 제목을 붙여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리라. 그것도 자신의 개인사의 참척을 우리가 살았던 시대의 아픔으로 승화시키면서 말이다.

 #참척의 아픔을 역류시켜 시대의 아픔으로, 다시 그 시대의 아픔을 결국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것으로 끌어안으며 세상에 태어난 작품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연극, 아니 모노드라마로 무대에 올려진 지 여러 날이 지났다. 하지만 그제야 벼르고 벼르다 그것이 무대에 올려진 서울 중구의 충무아트홀에 갔다. 무대 위에 홀로 선 손숙은 역시 배우였다. 박완서 선생의 소설을 정말이지 토씨 하나 틀림없을 만큼 그대로 재현했지만 소설과는 또 다른 맛의 그 뭔가를 만들어냈다. 아마도 그녀 역시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다른 예술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연극은 그 무대 위에 선 이의 아픔 혹은 그늘 없이는 표현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손숙은 그것을 연극, 아니 자기 삶의 모노드라마를 통해 표출하고 있었다. 본래 배우는 ‘배(俳=人+非)’자에서 드러나듯 ‘사람이 아니다’! 나로 머물지 않고 그 누군가의 삶이 돼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실제로 그것은 나 아닌 다른 영혼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 느낄 수 있고 울릴 수 있지 않겠나. 적어도 손숙은 이 모노드라마에서 그러했다. 극중에서 졸지에 아들 잃은 어미가 연방 베갯잇을 쓰다듬는 그 순간이 왠지 지금은 사라져 형체조차 사라진 아들의 육신을 더듬는 것처럼 다가온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

 #참으로 질기디 질긴 목숨이다. 자기 목숨과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생떼 같은 아들을 졸지에 잃고 난 후 어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살아오면서 바리바리 모아온 것들을 딸들 모르게 슬며시 버리는 것이 생활의 일과가 돼버린 그 어미에게 그래도 남아서, 가장 끝까지 남아서 그 해어질 대로 해어진 속을 또다시 후비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름아닌 아들에 대한 기억, 그 사무친 육신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리라. 그래서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제 자식의 욕창 난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에서 거친 욕을 해대는 여고 동창이 정말 부러웠을 것이다. 비록 욕창 난 식물인간 상태의 몸뚱이였지만 동창의 아들은 여하튼 살아 있었으니깐! 이 얼마나 처절한 집착인가. 우리는 그것을 모성이란 고상한 언어로 치장하지만 모성이란 결코 고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의 본능이며 절규다. 아니 절절한 집착이다. 만약 인간, 아니 인류가 고상하기만 한 존재였다면 우리는 이제껏 결코 생존해 오지 못했으리라. 지구상에서 인류는 이전에 절멸되었으리라. 그 미쳐버릴 듯한 절절함과 애절함 자체가 우리를 이제껏 살아 있게 만든 유전자의 가장 밑바닥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 시절이 시절인 만큼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유력한 대통령 후보에게도 정중하게 묻고 싶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무엇에 끝끝내 집착하고 얼마나 절절하게 나아가느냐가 곧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정진홍 논설위원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