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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묘비명 읽는 재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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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조화유
재미 칼럼니스트·소설가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 목사가 1970년대 미국에 처음 상륙했을 때 미국 기독교계는 통일교를 이단시(異端視)했다. 통일교의 교세 확산을 우려한 일부 세력은 문 목사의 약점을 캐기 시작, 결국 1982년 그는 탈세로 감옥에 들어가 18개월을 살고 나왔다.

 지난 9월 초 그의 죽음이 보도된 날 미국의 한 커미디언은 문선명 목사의 묘비에는 ‘The only things certain in life are death and taxes.(인생살이에서 확실한 건 오직 죽음과 세금뿐이더라)’라고 새겨질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이것은 미국 건국에 공로가 큰 언론출판업자이자 전기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벤자민 후랭클린의 유명한 말이기도 하다.

 서양에선 묘비명에 유머가 넘치는 글을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 공동묘지는 한국처럼 봉분이 아니라 작은 비석들만 잔디밭에 질서 있게 서 있거나 누워 있어서 공원 같은 인상을 준다. 그래서 한국의 공동묘지들과 달리 미국 공동묘지들은 대개 마을이나 도시의 한쪽 끝에 붙어 있다.

 며칠 전 동네 공동묘지를 산책하며 비석들을 둘러보았는데, 한 비석에 새겨진 묘비명을 보는 순간 확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엔 ‘I told you I was sick!.(내가 몸이 아프다고 그랬잖아!)’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것 참 기발한 묘비명이다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2002년에 83세로 사망한 영국의 유명한 커미디언 스파이크 밀리건의 묘비명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밀리건은 sick 대신 ill을 썼다.) 밀리건 묘비의 글은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묘비명으로도 뽑혔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묘비명은 영국 극작가로서 192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조오지 버나드 쇼의 것일 게다. 그는 자기 묘비에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라고 쓰게 했다. 흔히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우물쭈물하다’는 결단력이 없다는 뜻이므로 잘된 번역이라 할 수 없다. 정확한 번역은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이다.

 쇼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유머 감각이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한번은 한 여자 배우가 농담으로 “제가 만일 선생님과 결혼한다면 선생님의 두뇌와 저의 미모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겠지요?”라고 하자 “당신의 두뇌와 내 몸을 닮은 아이가 나오면 어쩌지요?”라고 응수했다는 일화도 있다.

 약 30년간 미국 TV 심야 토크 쇼의 황제처럼 군림했던 쟈니 카아슨은 자기 묘비에 뭐라고 쓸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그가 방송 중 광고가 나가기 직전 자주 하던 말 ‘I’ll be right back.(곧 돌아오겠습니다)’라고 쓰겠다고 말했다.

 미국 공동묘지에서 본 평범한 사람의 묘비명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102세에 죽은 사람의 묘비에 ‘착한 사람들은 일찍 죽는다’라고 새겨놓았는데, 고인이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 같아 웃긴다. 또 하나는 ‘일어나지 못해 미안합니다’인데, 고인은 아주 예의 바른 사람이었나 보다. 이것이 미국 작가 헤밍웨이의 묘비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학생(學生)○○○○○○지묘(之墓)’식의 전통적 비문을 버리고 서양식 묘비명을 쓰는 경우가 늘어난다고 한다. ‘걸레스님’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졌던 중광 스님 묘비에는 ‘에이 괜히 왔다 간다’라고 적혀 있다 한다. 시인 천상병의 묘비에는 그의 걸작 ‘귀천’의 한 구절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가 새겨져 있다 한다. 한때 간첩사건 연루 혐의로 끌려가 고통을 당했고, 이렇다 할 직장도 가져본 일이 없어 평생 어렵게 살았을 그가 하늘로 돌아가 이승이 아름다웠다고 전하겠다고 한 것에 진한 감동을 느낀다.

 이런 감동과 유머가 담긴 묘비명이 운명 직전에 떠오른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묘비명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는 과연 유머와 감동이 있는 삶을 살았는가.

조화유 재미 칼럼니스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