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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수도에 세운 만권당은 고려 자주를 위한 외교사령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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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700여 년 전 고려 26대 충선왕은 원나라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만권당을 세워놓고 쓰러져 가는 고려를 살리기 위한 힘겨운 외교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만권당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베이징 위위안탄(玉淵潭) 공원의 전경.

사대(事大)의 겉뜻은 ‘큰 나라 섬김’이지만 그 속내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행하는 외교적 교섭이다. 한반도는 주변 열강의 틈바구니에 있다. 따라서 사대는 역사 속의 우리에게 늘 따르는 외교적 형식일 수도 있었다. 중국과의 수교 20주년 특집으로 그 사대의 고달픔 속에 섰으면서도 자주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반도 역사의 주인공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고려 충선왕과 이제현, 조선 소현세자, 박지원을 비롯한 연행 관련 산문의 대가들이 대상이다.

 한방에서 명약으로 치는 동충하초(冬蟲夏草)의 명산지가 있다. 티베트 라싸로부터 다시 서쪽으로 400여㎞ 더 들어간 곳이다. 이름은 사꺄(薩迦). 해발 4500m의 고원, 오지로 손꼽히는 티베트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훨씬 깊숙이 들어가야 닿는 곳이다.

 요즘도 이곳을 찾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 이곳에 2년6개월 가까이 머무른 한반도 사람이 있다.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이다. 그 땅에 동충하초라는 명약이 나온다고 하지만, 사꺄는 희박한 산소에 식생이라고는 보잘것없는 척박한 오지다. 어엿한 고려의 왕을 지냈던 한반도 사람 충선은 왜 이곳에 그리 오래 머물렀던 것일까.

 요즘의 대한민국에서 충선왕을 거론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관련 기록이 적어 그가 고려의 상왕(上王·자리에서 물러난 전 임금)으로 오랜 세월 원(元)나라 수도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 머무른 이유를 확실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경의 사저에 만권당(萬卷堂)을 차려놓고 ‘중국의 시서(詩書) 수집에 매진했다’는 게 그의 행적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다. 역사에 등장하는 사실(史實)이 적더라도 그가 반드시 만권당을 차려놓고 책 수집에 몰두하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설명할 근거는 충분히 있다.

충선왕이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 익재 이제현과 강남 여행길에 들렀던 냉천정의 현액.

 1314년 그를 따라 연경으로 간 뒤 만권당에서 ‘고려의 대표적 문인’으로 활동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기록 때문이다. 당시 동양사회 문인의 지적인 교류는 대개 시를 주고받는 형태로 펼쳐졌다. 그가 남긴 『익재집(益齋集)』의 시 270수, 장단구 57수는 연경에 머물렀던 충선왕의 행적이 단순히 문학적 취미에 비롯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본지 취재팀이 익재 이제현의 시를 치밀하게 고증한 한국의 중국문학 원로학자 지영재 전 단국대 교수의 저서 『서정록(西征錄)을 찾아서』(푸른역사)를 근거로 찾아 나선 중국의 여행길에서는 충선왕의 자취를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고려의 개혁 군주였다. 중국을 석권한 원나라가 고려에 힘을 행사하던 시기는 1270년 무렵이었다. 1298년 부왕인 충렬왕의 뒤를 이어 잠시 왕위에 오른 충선은 여느 고려의 왕보다 개혁적이었다. 원나라와 결탁해 힘을 쌓은 권문세가의 횡포를 막고 인사를 비롯한 행정제도를 과감하게 뜯어고쳤다.

 그런 성향은 권문세가, 그리고 원을 등에 업은 부원파(附元派)의 반발을 불렀다. 마침내 왕위에 오른 지 6개월 만에 충선왕은 권좌에서 내려오고, 부왕이었던 충렬왕이 왕위에 복귀한다. 그리고 충선왕은 연경에 가서 그곳에 줄곧 머무른다. 이어 충선왕은 1308년 부친 충렬왕이 사망하자 고려왕에 다시 복귀해 각종 개혁조치를 취하다가 두 달 만에 연경에 간 뒤 전지(傳旨) 정치를 하며 귀국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중국을 석권한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다. 외가 쪽으로는 멀리 칭기즈칸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어릴 적 연경에서 자랄 때에는 외할아버지 쿠빌라이와 대화한 기록도 있다.

 황궁을 거닐던 외할아버지 쿠빌라이가 고려의 외손자인 어린 충선왕에게 “지금 뭘 읽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어린 충선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그래, 잘 읽어야 한다”면서 지나쳤다는 내용이다.

 아울러 원나라 무종(武宗) 카이산, 인종(仁宗) 아율발와다와는 외가 친척으로서 어렸을 적 함께 자란 사이였다. 그런 혈통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충선왕은 고려의 국운과 관련해서는 매우 자주적이었다. 그는 1313년 고려의 최고 명절인 팔관회(八關會·음력 11월 15일)에서 뛰어난 문장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26세 청년 이제현을 스카우트해 연경으로 데려간다.

 이듬해 2월에는 연경의 사저에 만권당을 연다. 이 만권당의 성격을 두고 여러 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현의 시문을 통해 보면 충선왕은 만권당을 통해 당시 원나라의 핵심 관료계층으로 자리 잡았던 한족(漢族) 사대부들과 교류한다. 고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여론 조성’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그 만권당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의 국빈 초대소 댜오위타이(釣魚臺) 서쪽에 위위안탄(玉淵潭)이라는 곳이 있다. 멀리 중앙텔레비전(CCTV)탑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중화세기단(中華世紀壇)과 붙어 있는 곳이다.

 만권당은 충선왕의 사저 안에 있었다. 충선은 즉위하기 전의 원나라 인종 아율발와다가 태자였을 적의 사부, 즉 태사(太師)였다. 따라서 그의 사저는 태자부가 있던 곳이었을 테다. 원나라의 태자부가 있던 곳이 바로 위위안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이곳에서 충선왕은 외교적 활동을 벌인다. 대상은 송설체(松雪體)의 필체로 고려와 조선에는 너무 잘 알려진 조맹부를 비롯해 염복(閻復), 요수(姚燧), 왕구(王構), 장양호(張養浩) 등이다. 원나라 한림원 출신이자 예부상서(외교부 차관 격) 등을 역임했던 고위급 관료들이다.

 이들과의 교류 장소는 물론 만권당이었다. 충선왕 또한 시문에 뛰어났다고 보이지만, 한족 지식사회 최고 수준급의 사대부들과 시문으로 화답(和答)하고 소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고려로부터 불러들인 이가 바로 이제현이다.

 이제현은 충선왕의 추천에 따라 지금의 쓰촨(四川) 아미산(峨眉山)에 보내는 황제의 제의(祭儀) 사절로 나서 중국에서 가장 험난한 길 촉도(蜀道)까지 넘나든다. 그 여행에서 이제현은 부지런히 ‘현장 리포트’에 열중한다. 마치 현대사회의 언론사 특파원처럼 현장을 지나면서 시문을 지어 원나라 역참(驛站)을 통해 만권당으로 보낸다.

  익재의 시가 도착하면 시회(詩會)가 열려 충선왕과 한족 사대부들은 그 시를 두고 교감한다. 만권당은 그렇게 충선왕이 의도적으로 개설한 고려의 ‘원나라 내 외교 사령탑’이었다는 게 지영재 원로 교수의 결론이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이제현을 앞세워 강남 여행길에 나선다. 저장(浙江)성의 불교 성지인 보타산(普陀山)에 향을 바치기 위해서였다. 그 둘의 자취는 이제현의 시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잘 정비된 원나라 경항(京杭·베이징~항저우) 대운하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운하를 따라 여행하면서 충선왕과 익재는 여러 곳을 거친다. 항주에서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와 북송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가 즐겨 찾았던 영은사(靈隱寺)의 유명 정자 냉천정(冷泉亭)을 들렀다. 남송이 원나라에 의해 마지막으로 멸망한 전쟁터,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싸움에 등장하는 범려와 서시(西施)의 자취를 좇는다.

 눈에 띄는 여정은 조맹부의 고향 후저우(湖州)시에 들렀던 일이다. 그때 마침 조맹부는 아내를 떠나보낸 뒤였다. 충선왕과 익재는 여행길에 상처(喪妻)한 조맹부를 문상(問喪)했던 셈이다. 원나라 무종과 인종의 즉위 과정에는 충선왕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무종과 인종이 재위하고 있을 때의 충선왕은 원나라 정계에서 매우 강력한 실력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 황제 인종이 사망하면서 충선왕은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1320년 두 번째로 강남 여행길에 나섰던 충선왕은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시다발라, 원 영종(英宗)에 의해 붙잡혀 음력 6월 연경으로 돌아온다.

 이어 충선왕은 10월에 형부(刑部)로 들어가 머리를 깎인 뒤 석불사(石佛寺)라는 곳에 안치됐다. 이듬해 1월 3일 충선왕은 연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지 중의 오지 사꺄로 유배를 떠난다. 2년6개월 뒤 감형의 일종인 양이(量移)를 받아 간쑤(甘肅)성 도스마로 옮겨졌다가 연경으로 돌아와 곧 사망한다.

 그가 유배를 떠난 데에는 고려 출신 환관(宦官)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 등 부원파의 모함이 작용했다. 고려를 통째로 원나라 영토로 편입시키자는 게 당시 부원파의 정치적 지향이었으니, 만권당을 차려놓고 점차 몽골의 풍습과 영향력에 깊이 빠져가던 고려의 운명을 외교적으로 유지하려던 충선은 그 대척점에 서 있었던 셈이다.

 원나라와의 교섭을 통해 쓰러져 가는 고려의 국체를 부지코자 했던 만권당의 주인공 충선왕, 그의 고뇌와 노력을 이제현의 기록으로 더 살펴보자.

특별취재팀=유광종·허귀식·박소영·민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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