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명예의 전당 (25) - 지미 팍스 (1)

중앙일보

입력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스갯소리 섞인 과장일 뿐이다.

닐 암스트롱은 1969년에 달에 도달했을 때, 지미 팍스가 32년 전에 레프티 고메스를 상대하여 날린 홈런 볼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 볼이 실제로 떨어진 곳은 달 표면이 아니라 양키 스타디움의 왼쪽 외야석 3층이었다. 다시 말해, 그 타구의 비거리는 38만 킬로미터가 아니라 168미터에 '불과'했다.

또한 팍스는, 결코 '머리카락마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보통 사람의 것과 마찬가지로 알파케라틴이라는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고메스의 그러한 언급들이 사실이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우매한 짓을 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겐 적어도 허풍과 실제 경험담을 구분할 정도의 능력은 있지 않은가(사실 고메스의 허풍은 유명했다).

그러나, 그 '허풍'들을 전혀 의미 없는 빈말 정도로 치부한다면 그것 또한 우매한 짓일 것이다. 고메스의 말들은 1930년대의 아메리칸 리그 투수들이 지미 팍스를 상대하면서 느껴야 했던 감정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공포'였다.

누가 이 슬러거의 파워에 경탄하지 않을 수 있었던가? 그가 화이트 삭스의 홈 구장 코미스키 파크에서 날린 한 타구는, 외야석을 가볍게 넘어간 뒤 길을 넘어 건너편에 떨어졌다. 신시내티 레즈의 홈이었던 크라즐리 필드에서 열린 한 시범 경기에서는, 팍스의 홈런 볼이 경기장 밖의 한 건물에 달려 있던 간판의 상단에 튀긴 뒤 다른 건물의 옥상에 떨어졌다. 애슬레틱스 시절 팍스의 주무대였던 샤이브 파크와 타이거스의 옛 홈인 네이빈 필드에서도, 팍스의 경이적인 홈런은 전설로 남았다.

팍스가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홈런을 날릴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타격 스타일이 크게 작용했다. 베이브 루스의 등장 이후 나타난 홈런 타자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별되었다. 한 가지는 파워를 앞세워 타구를 높이 떠올리는 스타일로, 루스와 하먼 킬러브루, 마크 맥과이어 등이 이에 속했다. 다른 한 가지는 근력보다는 빠른 배트 스피드와 유연한 손목을 이용하여 라인 드라이브에 가까운 홈런을 양산하는 타자들이었며, 행크 에런과 어니 뱅크스 등은 이러한 스타일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팍스는 기본적으로 후자에 속했지만, 근력에서도 다른 타자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즉 두 유형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빅 리그에 데뷔한 후 1942년까지 팍스와 함께 레드 삭스에서 활약한 테드 윌리엄스는, 팍스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그의 타구가 뻗어나갈 때 나는 소리는 마치 총탄의 그것과도 같았다. 나는 그의 근육을 목격할 때마다, 나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껴야 했다. 나와 동시대에 활약한 선수 중 조 디마지오 다음으로 위대했던 인물은 팍스였다."

루 게릭이 없었더라면, 루스의 쇠퇴 이후 팍스는 타자들 중 군계일학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특히 파워만을 놓고 본다면, 루스의 후계자는 팍스였다. 그가 1930년대에 날린 홈런은 무려 415개였다. 즉 그는 이 시기에 시즌당 평균 40개 이상의 홈런을 날린 것이다.

1966년 7월까지만 해도, 팍스는 역대 홈런 랭킹에서 루스 외의 어느 선수보다도 아래에 있지 않았다. 즉 그는 20세기의 2/3정도가 흐른 시점까지도, 우타자로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을 날린 인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1922타점은 역대 7위에 랭크된 기록이다.

500홈런 클럽 멤버 중 1950년 이전에 빅 리그에 등장한 인물은 그와 루스, 윌리엄스, 멜 아트뿐이다. 후대에 타자들 사이에 홈런 선호 경향이 번지면서, 그의 홈런 기록을 추월하는 선수가 여러 명 생겨나기는 했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그의 534홈런은 현대의 600홈런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팍스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에 빠뜨릴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역사상 유일한 12시즌 연속 30홈런 기록이다. 루스나 에런도 이와 같은 기록은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13시즌 연속 100타점 기록 보유자는 팍스와 게릭뿐이다.

팍스의 강점은 홈런에만 있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타자에 대한 평가 수단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던 타율에서도, 그는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통산 타율은 .325였으며, 그는 두 번이나 리그 타격왕에 올랐다. 물론 타율을 기준으로 타자를 평가하는 것은 상당히 부정확한 방식이다. 그러나 적어도 통계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 방식에 익숙한 팬들에게, 팍스의 타율은 그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선수에 대한 합리적 평가 수단으로 새로이 현대에 제시된 각종 통계들을 이용한다면, 팍스의 위대함을 더욱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피트 파머가 고안한 OPS(프러덕션)이나 BR(Batting Runs), 클레이 대븐포트의 EqA등 세이버메트릭스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통계들은, 팍스보다 뛰어났다고 할 수 있는 타자는 극히 소수였음을 잘 보여 주고있다.

역대 타자들을 '쌓아올린 기록의 무게와 뛰어난 기량을 유지한 기간'이 아니라 '당대의 다른 타자들에 비해 뛰어났던 정도'라는 척도에 따라 평가한다면, 팍스보다 확실히 앞섰다고 할 수 있는 선수는 루스와 게릭, 윌리엄스뿐이다. 야구 역사가들은, 타력만을 놓고 본다면 역대 우타자 중에서는 팍스와 혼즈비가 가장 뛰어났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면에서는 항상 '행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광스러운 기록들은 때때로 그를 외면하기도 하였다.

1932년에 그에게 조금만 운이 따랐더라면, 1998년에 마크 맥과이어가 도전했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은 매리스가 아닌 팍스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해에 58홈런으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샤이브 파크와 세인트루이스의 스포츠맨스 파크, 클리블랜드의 리그 파크 등에서 그의 타구가 펜스 위의 스크린을 맞춘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이 타구들은 모두 규정에 따라 2루타로 처리되었다. 5년 전에 루스가 60홈런을 날려 기록을 수립했을 때는, 이 스크린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별개의 팀에 속한 선수들이 별개의 시즌에 수립한 기록들을 비교하는 일은 애당초 '공정성'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1927년의 루스와 1932년의 팍스가 각각 활동한 여건은 스크린이 세워졌든 그렇지 않았든 서로 동일할 수가 없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팍스가 대기록의 보유자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는 인물이었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팍스가 겪었던 불운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1932년에 그는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는 독주 끝에 수위에 올랐으나, 타율에서는 데일 알렉산더에 .003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밀려 트리플 크라우너가 되지 못했다. 당시에는 한 시즌에 100회 이상의 경기에 출전한 선수는 타수가 지나치게 적지만 않으면 타율 부문 순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 자격에 대한 규정은 이후 자주 바뀌었는데, 1945년 이후의 규정 중 어느 것을 적용해도 알렉산더는 자격 미달이었다.

이듬해인 1933년에 드디어 그는 트리플 크라운의 위업을 달성하였지만, 1938년에는 또다시 불운이 그를 이 영광과 인연맺지 못하게 했다. 175타점과 .349의 타율은 그 누구도 앞설 수 없는 기록이었지만, 50홈런은 이 시즌에만큼은 최고가 되지 못했다. 행크 그린버그가 생애 최다인 58홈런을 날렸기 때문이다. 그린버그의 다른 시즌 홈런 기록 중 최고는 44개였다.

만약 1932년과 1938년에 그에게 조금만 더 운이 따랐더라면, 그는 트리플 크라운을 3번 차지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트리플 크라운 경력을 보유한 타자는 총 12명이며, 이 중 2회에 걸쳐 이 영광의 주인공이 된 선수는 윌리엄스와 로저스 혼즈비뿐이다.

(2편에 계속)

※ 명예의 전당 홈으로 가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