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문화트렌드] 기록된 역사가 전부일 리 없잖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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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호 28면

요즘 극장가와 TV 채널은 역사적 사실(fact)과 허구(fiction)가 조합된 팩션(faction)의 향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차태현)와 무인 백동수(오지호)가 서빙고를 털어 그곳을 관리하는 부패 고위 관료를 혼내준다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8월 8일 개봉 뒤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흥미로운 설정에 어울리는 다른 제목도 있을 텐데 굳이 할리우드 고전 명화의 제목을 카피한 것은 유감이다. 어쨌든 주인공 이덕무와 백동수는 실존 인물로서 영화에서처럼 서얼 출신이고 처남·매부 간이었다. 함께 정조의 명을 받아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서빙고를 터는 것은 영화적 상상이지만.

팩션+타임슬립의 인기

같은 날 개봉한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세종대왕이 충녕대군이었던 시절 ‘왕자와 거지’ 같은 사건을 겪었다는 팩션 코미디다(주지훈이 1인 2역). 이달 중순 개봉할 ‘광해, 왕이 된 남자’(사진)는 비슷한 듯 다른 설정인데, 어떤 천민이 광해군과 얼굴이 비슷해 그의 대역으로 발탁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이병헌이 1인 2역).
여기에다 TV는 ‘팩션+타임슬립(시간여행)’ 드라마의 연속이다. 지금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신의’는 고려 후기 무사 최영(이민호)이 공민왕의 비 노국공주를 치료할 하늘의 의원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최근 종영한 MBC 드라마 ‘닥터 진’은 현대 의사 진혁(송승헌)이 조선 말기로 시간이동을 해 흥선대원군 등을 만나고 의술을 펼친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영화와 TV 드라마에 팩션이 많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은 재미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일 것이다. 팩션은 현대가 배경이면 사용할 수 없는 극적 상황, 이를테면 군주를 둘러싼 극단적인 정치적 음모나 신분제도로 인한 갈등, 또 현대가 배경이면 어색할 수 있는 판타지적 요소를 이용할 수 있다. 여기에다 신기에 가까운 무예와 주술, 그리고 고풍스럽고 화려한 비주얼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영화와 드라마에 좀 더 자유로운 상상이 동원되면서도 여전히 현실과 닿아 있기를 바라는 것이 적지 않은 관객의 경향이다. 올해 초에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경우에는 아예 가상의 왕 이훤과 그의 연인이 주인공이어서 팩션이 아닌 판타지였다. 그런데도 인터넷에는 ‘이훤이 조선의 어느 왕을 모델로 한 것이냐’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환상에 기반한 드라마일망정 조금이라도 현실적 요소가 있기를 바라는 시청자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다. 여기에서 팩션이 탄생한다.

또 팩션은 현대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에둘러 풍자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군주제와 신분제도는 더 이상 없지만 정치 암투와 계층 갈등은 현대에도 존재한다. 그것을 극단적인 역사적 사건에 빗대 간접적이면서도 더 강렬하게 현실을 풍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이유 위에는 ‘정사(正史)’라는 것을 불신하고, 역사의 수많은 빈틈에 주목하고, 나아가 더 이상 ‘고정된 역사’를 믿지 않는 현대의 사상적·문화적 경향이 있을 것이다. 20세기 중·후반 구조주의 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전반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보르헤스는 이런 말을 했다. “과거란 현실적 실체가 없는 현재적 기억과 같은 것이다.” 그는 또 우리의 삶이 “이미 흘러가버려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과정에 대한 어슴푸레하고 의심할 여지 없이 조작되고 왜곡된 기억”이라고 했다.

우리에겐 사실 며칠 전에 일어난 사건의 정보조차 정확하지 않다.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조차 그가 있던 위치와 사건을 접하게 된 전후 맥락, 개인적 관점에 따라 천차만별의 정보를 전달하게 된다. 그것이 여러 사람을 거치고 여러 맥락을 통과하게 되면 더더욱 달라진다. 이런 와중에 더 오래된 역사를 믿을 수 있을까? 영국 소설가 줄리언 번스는 2011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픽션을 가미해 역사를 새로 쓰지 못할 이유도 없다. 픽션 속의 일이 일어났다는 보장은 없지만 일어나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다. 더욱이 우울한 역사의 경우에는 그것을 새롭게 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지금 덕수궁 함녕전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는 세계적 설치미술가 서도호는 “역사는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꾼이 어떤 사건을 골라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그 사건들 사이에는 수많은 틈새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 틈새에서 팩션이 나온다. 그리고 틈새들이 있는 한 팩션의 생산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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