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 정상에 얼어 말라붙은 표범 사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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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첫머리를 이렇게 썼다. “킬리만자로는 높이 1만9710피트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그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어로 ‘응가예 응가이’, 즉 ‘신의 집’이라고 부른다. 이 서쪽 봉우리 가까이에 얼어서 말라붙은 표범 사체가 있다. 그 높은 곳까지 표범은 무엇을 찾아 헤맨 걸까?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헤밍웨이가 말한 그 ‘서쪽 봉우리’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산봉우리를 덮었다는 만년설은 초라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지난달 7일 오전 8시 해발 5895m 킬리만자로 정상 우후루피크 부근. 고산병 증세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구토가 나오려는 와중에도 신비로운 만년설의 모습을 상상했다. ‘웅장한 빙벽, 눈과 코를 찌를 듯 강렬하게 빛을 반사시키는 설원, 깊숙이 쌓인 눈 때문에 등산화 바닥이 뽀드득거리는 소리…’. 8시간 전 자정 무렵 해발 4700m 키보산장에서부터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막상 정상에서 바라본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은 상상과는 달랐다. 하얀 눈보다 검은 흙바닥이 더 많이 보였다.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판 옆으로 멀리 빙벽이 보였지만 웅장함보다 초라함이 느껴졌다. 통상 6월부터 10월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기라 해도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쌓인 눈이라 해 봤자 발목 높이에도 모자랐다. 원정대의 등반을 책임진 케냐 출신의 베테랑 가이드 윌슨 마웨(59)는 “예전엔 만년설의 범위가 넓고 정상 부근도 매우 추웠다. 4피트(약 1.2m)까지 눈이 쌓이기도 해 전문장비가 필요할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엔 점점 눈과 빙하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19세 때부터 킬리만자로를 오르내린 그는 “요즘은 등산객들이 기후온난화에 대해 많이 묻는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1993년 2월 17일 킬리만자로 정상의 만년설(左), 2000년 2월 21일 킬리만자로 정상의 만년설(右). [사진 나사]

 ‘아프리카의 지붕’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산’ 킬리만자로. 스와힐리어로 ‘빛나는 산’ 또는 ‘하얀 산’이라는 그 이름답게 정상의 만년설은 여전히 신비롭게 다가온다. 하지만 헤밍웨이가 표범을 보며 인생을 고뇌하던 킬리만자로는 이제 지구온난화가 부른 피해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 전문가는 “앞으로 20년 뒤면 만년설을 아예 볼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그 기후변화의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우리나라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찾았다. 기아자동차가 주최하고 유엔환경계획(UNEP) 한국위원회가 주관한 ‘2012 에코다이나믹스 원정대’를 통해서다. 대학생 멘토 8명, 중·고교생 32명으로 이뤄진 원정대는 7월 31일부터 8월 11일까지 킬리만자로 등반을 비롯해 케냐와 탄자니아 일대를 탐방했다.

지난달 6일 청소년?대학생들로 구성된 에코다이나믹스 원정대원들이 킬리만자로 해발 4700m 부근 키보 산장을 향해 오르고 있다. [사진 펀키아]

 기후온난화로 인해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이 사라지고 있다는 주장은 연구 결과로도 입증된다. 2009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연구진은 킬리만자로에서 1912년 이래 85%가량의 얼음이 자취를 감췄으며 특히 지난 10년 동안에만 26%가 사라졌다고 발표했다. 케냐 나이로비에 본부를 둔 UNEP도 62년부터 2000년까지 38년간 킬리만자로의 빙하 55%가 사라졌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일각에선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라기보다 단순히 강수량이 줄어든 탓”이라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UNEP 한국위원회 한지희(30) 교육팀장은 “강수량 감소 역시 결국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원정대의 등반은 지난달 4일부터 8일까지 4박5일간 진행됐다. 원정대가 이용한 루트는 킬리만자로 정상까지 닿을 수 있는 여러 코스 중 유일하게 북쪽 케냐 국경 지역에서 시작하는 롱가이 루트. 첫째 날, 탄자니아 모시의 마랑구 호텔에서 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 해발 1950m 날레무루 게이트에 도착했다. 이내 아름다운 원시림지대가 펼쳐졌다. 킬리만자로에서는 정상까지 오르며 고도에 따라 원시림지대, 관목지대, 고산성 사막지대, 빙하로 덮인 용암지대를 차례로 경험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여름철 휴가기간을 맞아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 온 등산객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찾는 이가 늘면서 부작용도 생겼다. 해발 2600m 심바 캠프에서 해발 3950m 서드 케이브까지 올라가는 도중엔 검게 탄 나무와 잿더미로 변한 들판이 펼쳐졌다. 30분 정도 오르는 내내 등산로 양쪽으로 온통 검게 그을린 나무가 보였다. 지난 3월 큰 산불이 발생해 최소한 수천㎡에 이르는 땅이 잿더미로 변했다고 한다. 가이드는 “아마 등산객이나 가이드가 피우다 버린 담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만 킬리만자로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 셈이다.

 해발 5689m 길만스 포인트에 닿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탄자니아국립공원 측은 바로 이 지점부터 정상에 올랐다는 증명서를 발급해 준다. 학생과 스태프를 포함해 50여 명이 출발했지만 고산병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 하산한 대원이 많았다. 이곳에 오른 등반대는 총 22명. 하지만 고산병을 이겨 내고 정상 부근에 도착했다는 기쁨은 잠깐이었다. 아름다운 정상 경치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쓰레기였다. 등산객들이 버린 것으로 보이는 페트병과 과자 봉지가 바위 틈새 곳곳에 버려져 있었다. 한글로 ‘연양갱’이라고 적힌 쓰레기도 보였다. 순간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뭄 문제도 심각했다. 건기는 물론이고 우기 때도 비가 부족한 실정이다. 해발 3720m 호롬보 산장으로 향하는 하산길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만년설이 녹아 지하수로 흘러 들어와 생긴 시냇물이었다. 눈 녹은 깨끗한 물이었지만 기름띠와 거품이 보였다. “인근 주민들이 이 시냇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염이 되고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뒤따랐다. 킬리만자로 등반 전 방문했던 케냐 암보셀리국립공원 가이드 조셉 카슈 올로바라(50)는 “우기에도 비가 안 오는 날이 많다. 킬리만자로 만년설도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물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킬리만자로 바로 아랫마을인 로이토키톡에서 태어난 그는 기자의 이름표에 적힌 ‘Press’를 보고 “Global warming(지구온난화)”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50년 평생을 지켜본 ‘신의 집’ 킬리만자로가 예전 같지 않음을 알리고 싶은 절박함이 엿보였다.

 이번 원정대는 40명 모집에 500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려 125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서류와 면접 심사를 어렵게 통과한 만큼 대원들의 면면도 다양했다. 홍애진(광주 중앙여고 2년)양은 지난해 학교에 환경동아리를 만들었다.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환경 관련 강의를 하고 환경과 관련된 주제를 정해 친구들과 함께 연구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1년 만에 회원이 60명까지 늘었고 학교의 정식 동아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대학생 멘토 조근우(대구가톨릭대 4년)씨는 대구 지역 또래 대학생과 의기투합해 태양열에너지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기금 마련을 통해 태양열전지판을 설치해 전기를 생산하고 그 전기를 팔아 녹색에너지 관련 사업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그 첫 결과물로 대구시 두산동 주민센터 옥상에 태양열 전지판을 설치했고 오는 5일 준공식을 할 예정이다.

 이번 원정대 활동을 통해 대원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홍양은 “그렇게 높은 정상의 만년설이 녹고 있는 게 결국 인간의 자연 파괴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상까지 올랐던 김윤석(부산외고 3년)군은 “킬리만자로 만년설을 찍은 흑백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에 비해 심각하게 줄어든 지금의 모습을 보니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며 “에어컨 사용을 줄이거나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등 작은 방법부터 실천해야겠다”고 말했다.

 일정 내내 기자는 ‘죄책감’이 들었다, 환경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원정대원 40명이 산에 오르는 게 오히려 킬리만자로를 훼손하는 일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한국에서 타고 온 비행기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량도 어마어마할 테니 말이다. 케냐 나이로비 UNEP 대외협력처 청소년 담당관인 티어도르 오벤(46)은 기자가 느낀 마음의 짐을 이렇게 덜어 줬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행을 하게 된다면 최대한 배기가스를 줄이는 방법을 선택하라는 것이고, 혹시 불가피하게 배기가스를 방출했을 땐 그에 합당한 보상을 고민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무를 심거나 나무를 심는 누군가를 후원하는 정도의 보상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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