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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한국을 덮치는 보호무역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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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지난해 4월 애플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 소송을 제기하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못이 튀어나오면 때리려는 원리”라고 했다. 그런 불길한 예언이 현실화되고 있다. 우리 수출 기업들을 향해 특허 소송과 무역보복이라는 거센 쓰나미가 덮쳐오고 있다. 유럽발 경제위기로 세계 경제가 혼미를 거듭하는 데다 중요한 선거를 앞둔 세계 각국이 불황과 실업으로 인한 내부 분노를 외국 기업 탓으로 돌리려는 분위기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려해 온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독 한국산 제품들이 집중 포화를 맞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 소송이다. 미국 배심원들의 텃세가 작용하면서 자국 기업인 애플의 손을 들어줘 1조원이 넘는 배상금을 매겼다. 지난해 11월에는 미 법원이 듀폰의 영업비밀을 침해한 혐의로 코오롱에 대해 지난 5년간 미국에 수출한 금액의 300배가 넘는 약 1조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뿐이 아니다. 세계적인 특허 괴물들이 한국 기업들을 괴롭히면서 지난해 미 법원에만 117건의 특허 소송이 제기돼 있다. 불과 2년 전에 비해 무려 80% 이상 늘어난 수치다.

 보호무역 장벽은 특허와 같은 기술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 전통적 무역분쟁인 반덤핑 소송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미 무역위원회는 월풀의 반덤핑 제소에 따라 지난달 한국산 냉장고에 대해 최고 82%의 예비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 우리 냉장고에 밀려 월풀의 시장 점유율이 35%에서 한 자릿수로 내려앉은 데 따른 보복으로 보인다. 프랑스 정부도 자국 자동차산업이 경영난에 처하자 유럽연합(EU)에 한국산 자동차에 대한 수입 규제를 요청했다.

 올 들어 한국 상품에 대한 수입 규제는 122건에 달해 지난해 전체 규제 건수(117건)를 뛰어넘었다. 최근에는 선진국들뿐 아니라 중국·인도·브라질 등 우리와 똑같이 수출에 치중하는 신흥개발국들마저 한국 제품 견제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미 인도는 우리 제품에 24건, 중국은 18건의 수입 규제 조치를 내렸다. 특히 무역보복이 우리의 주력 수출제품인 전자·자동차·철강·화학에 집중되고 있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최근 고조되는 보호무역주의는 범위가 넓어지고 제재 강도도 세지는 추세다. 현지 정부의 개입 역시 노골화되는 분위기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실제 피해가 발생하면 사후 조치를 내리도록 하고 있지만 요즘에는 사전에 무역구제 조치가 남발되는 추세다. 여기에다 민간기업에 공적자금 투입, 경쟁력이 떨어지는 업종의 고용을 보호하기 위한 보조금 지급과 채무 보증 등 간접적인 무역장벽까지 높이 쌓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산업과 일자리를 보호하라는 국내 압력에 따라 자유무역의 원칙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세계를 휩쓰는 보호무역주의는 이제 손 놓고 지켜볼 단계를 지났다. 이미 G20 정상회의에서 거듭 ‘보호무역주의 자제’를 다짐했는데도 무역분쟁은 급증하는 추세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G2라 불리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도 무역 보복의 전운이 짙어가고 있다. 이런 파고를 우리 혼자 힘으로는 막기 어렵다. 현재로선 각 기업들이 특허 소송이나 무역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유일한 예방책이다. 특허 침해나 반덤핑 제소를 당하면 국제법에 따라 적극 대응하는 것 말고는 뾰쪽한 방법이 없다.

 그러나 온 지구촌으로 번지는 보호무역주의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환율전쟁이나 보호무역이 기승을 부리면 근린궁핍화(近隣窮乏化)로 인해 모두가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1930년 미국의 ‘스무트-홀리 관세법’과 무역전쟁으로 전 세계가 대공황의 수렁에 빠졌던 뼈아픈 역사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보호무역을 잠재우려면 국제 공조의 틀 속에서 서로가 자제심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 정부도 G20을 포함한 국제 통상회의 때마다 보호무역주의의 위험성을 알리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또한 정부와 수출 기업들이 손잡고 수출 상대국의 동향을 한발 먼저 파악해 무역분쟁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다. 튀어나온 못이 망치를 부른다고 하지만 아무리 망치로 때린다 해도 못은 더욱 깊숙이 박혀야 할 운명이다. 언젠가 보호무역의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고 나면 승자가 분명히 가려질 것이다. 그때까지 기술개발과 생산효율성 제고로 비(非)가격 경쟁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면서 인내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호무역에 기댄 나라치고 승리를 거둔 경우는 없었다.